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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Dec 26. 2020

공민왕(恭愍王)에 대한 평가

공민왕은 1330년 아버지 충숙왕과 어머니 공원왕후 홍씨 사이에서 태어나서 1374년 자제위와 내시 최만생에 의하여 암살을 당해 시해된 임금입니다. 특이한 점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공민왕 사당이 마포구 광흥창역 인근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근 지역주민들은 잘아는 사실이지만 조선시대 녹봉 등, 양곡을 저장하는 광흥창 창고 인근에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모시는 사당이 존재합니다. 사당이 세워진 이유로 유래로는 창고지기의 꿈에 공민왕이 나타나 "이곳은 전에 내가 자주 찾던 곳이니 당(堂)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내준다면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풀려질 것이며 만일 이를 실천하지 못한다면 매년 사고가 날 것이다."하여 사당을 짓고 매년 음력 10월 1일 제사를 지냈고 현재까지 이어져 마포문화원에서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다른 특이한 점은 역대 조선 왕들의 위패를 모신 종묘에 고려 왕으로는 유일하게 공민왕 신당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묘의 역사를 기록한 <종묘지> 에는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공민왕 영정이 날라오는 일이 일어나서 신당을 짓고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초상화와 공민왕의 그림들이 내부에 있다고 합니다.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論語)의 술이편에 보면 공자는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유교에서는 비합리적인 기사나 이적을 배척합니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조선시대에는 무당들이 천대를 받았고 불교도 배쳑을 받았으며 조선후기에 전파된 천주교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탄압을 받았습니다. 물론 조선시대의 도덕책인 <오륜행실도>에는 효자들에게 간혹 이적이 일어나고있고 유학자들도 신하가 하늘을 위하고 자식이 부모를 받드는 마음이 지극하다보면 하늘이 반응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종묘와 광흥창역에 공민왕과 관련된 이적이 일어나고 공민왕을 모시는 사당이 만들어지는 것은 어떤 이유로 설명될 수 있을까? 창고지기의 꿈에 등장했다고 공식적으로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에서 공민왕을 위한 사당을 만드는 것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조선의 건국세력들은 고려의 왕족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공민왕 후대 임금들의 운명은 비극적입니다. 우왕은 강릉에서 25세에, 창왕은 강화도에서 10세에 죽었고, 본인은 왕이 되기 싫어했지만 제비뽑기로 억지로 왕이 되었던 공양왕도 왕비인 순비 노씨와 함께 아들 왕석도 삼척에서 사약을 받았습니다. 현재까지도 신라의 왕족인 경주 김씨나 밀양 박씨, 가야의 김해 김씨, 조선의 왕족들인 전주 이씨의 후손들은 많이 만날 수 있는데 비하여, 고려의 왕씨 후손들은 희소합니다. 더구나 태조 이성계 3년 고려의 유신세력들이 태조와 공양왕의 운세중 누가 더좋은 지 물었다는 행위가 역모로 간주되어 왕씨 후손들은 거제도 등 섬으로 옮겼다가 강화도와 거제도에서 대규모 학살극이 벌어졌던 이유라 합니다. 살아남은 왕씨들은 성을 전씨나 옥씨 등으로 성명을 숨기고 숨어살아야만 했다고 합니다.


그런 조선왕조에서 희귀하게 공민왕을 모시는 사당이 서울에서 마포와 종묘에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때문일까요. 이성계 세력이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킨 명분은 폐가입진(廢假立眞) 즉 가짜를 몰아내고 진짜를 세운다는 명분이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고려사에는 우왕과 창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신하로 간주하여 열전에 기록하였고 이름도 신우와 신창으로 기록하여 신돈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 공민왕도 노국공주가 죽은뒤 신돈과 같은 근본없는 요승(妖僧)을 등용한 인물로, 그리고 자제위를 설치하여 패륜적인 행위를 저지른 임금으로 묘사하여 조선왕조의 정당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의 탁월함을 강조하려는 조선의 입장에서 원나라 쌍성총관부 출신의 이자춘과 이성계를 고려로 받아들이고 우다치라는 왕의 경호대로 발탁한 군주로써 공민왕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이 남아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당연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조선 초기에는 공민왕은 총명하고 능력있는 군주로 평가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공민왕에 대하여 긍정과 부정의 평가가 공존하지만 조선조 초기 이방원의 동서이기도 했던 조박이 고려왕들중 성종, 문종, 공민왕의 업적을 언급하면서 "공민왕은 두 번이나 홍건적(紅巾賊)을 섬멸하면서 삼한(三韓)을 다시 부흥하고, 상국(上國)을 잘 섬겨 한 나라를 편안하게 하였습니다. 모두 동방에 공로가 있는 것입니다. 청하건대 마전군(麻田郡) 태조묘(太祖廟)에 붙여 제사지내게 하소서"하니 태조 이성계 께서 윤허하였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불교가 지배하는 고려에서 이성계와 신흥 유신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계기는 공민왕의 통치방식의 변화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고려에서는 귀족정치의 특성상 아버지의 관직을 자식들이 음서로 세습하는 흐름이었지만 이러한 폐단을 인식하고  원나라 성균관을 통하여 학습하고, 제과를 통하여 인재를 뽑는 개혁을 이루기 위하여 공민왕의 지시로 신돈의 주관하에 이색을 대사성에 임명하여 개경에 중영(重營)된 성균관을 통하여 주희의 성리학이 전파되고 <사서집주>가 필독서로 자리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조선 건국 초기에는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던 공민왕이었지만 점점 부정적인 평가가 득세하기 시작하였고 16세기에 접어들면서 공민왕은 광해군과 같이 부정적인 이미지로 추락하였고 점차 망국의 군주로 평가되면서 마치 지금 평가기준으로는 조선의 고종과 같은 위치로 평가절하되어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공민왕은 아버지 충숙왕을 비롯해 고려 지식인들이 기대하던 군주였다고 합니다. 형 충혜왕이 너무나 문제가 많았고 조카 충목왕, 충정왕이 8살, 충정왕이 2살의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다보니 더욱 그러했으리라 생각됩니다. 22살에 왕이 되어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하였으나 밖으로 홍건적, 왜구, 원나라의 간섭이 있었고 안으로 권문세족의 세력을 견제하기에는 신진관료들의 힘이 너무나 미약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공민왕과 신돈이 꿈꾸었던 토지개혁과 관료제도는 고려의 성균관을 통하여 배출된 신진유학자들에 의하여 현실화되기도 하였습니다. 공민왕이 모험적으로 시도하였던 친명정책을 조선은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연호를 쓰는 등 명나라에 추종하면서 시대의 조류를 외면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공민왕을 비웃던 조선이 자신들의 허물을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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