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첫사랑은 여름처럼

성장

by 다움

그 장면을 떠올릴 때면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따뜻하던 햇살, 교정 끝 벤치에 앉아 있던 그의 웃음, 그리고 마지막 인사조차 제대로 건네지 못한 채 멀어져 가던 뒷모습까지 모두가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했고, 그만큼 선명한 실연의 아픔도 배웠다.


그를 처음 만난 날은 고등학교 1학년 어느 여름 밤이었다.

눅눅하게 달라붙는 공기에 지쳐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버스에서 내려 걸음을 옮기던 순간, 누군가가 갑자기 앞을 가로막았다.

놀라 멈칫했지만 익숙한 얼굴이었다. 친구에게서 그가 내 사진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올 게 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쭈뼛거리며 서툰 말로 인사를 건네는 그의 모습에 경계심이 풀렸다.

가볍게 말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동네 입구에 도착해 있었고, 그냥 헤어지기에는 아쉬움이 남아 공터 한쪽에 앉아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의 꿈은 판사, 내 꿈은 교사였다. 서로의 꿈을 응원하며 언젠가 함께 웃자고 약속했다.

첫 만남부터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편안했다.

그러다 그는 장난스럽게 내 노래를 듣고 싶다며 조르더니, 내가 ‘밤배’를 살짝 흥얼거리자 눈을 감고 노랫소리에 기울였다.

그 순간, 세상이 마치 우리 둘 만을 위해 잠시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밤하늘에서는 별들이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날 이후 그는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날 때마다 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고, 다시 버스를 타고 자취 방으로 돌아갔다.

그 시간들이 쌓이며 우리는 차츰 서로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하지만 성장은 언제나 상처를 동반하는 법인지, 모든 것이 한순간에 금이 가 버렸다.

그 시절에는 학교 밖에서 남녀 학생이 함께 있는 것 만으로도 큰 잘못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평소처럼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 가다가 주임 선생님과 마주쳤다.

선생님의 호통에 우리는 마치 큰 죄를 지은 듯 겁에 질렸고, 두려움 속에서 성급히 서로의 손을 놓고 말았다.

그 이후로는 마주치는 것조차 어색해져, 피하며 지내는 날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웃으며 지내는 그의 모습도, 나를 못 본 척 스쳐 지나가는 태도도 날카로운 비수처럼 내 마음을 찔렀다.

손에 쥔 풍선을 놓친 아이처럼, 내 마음은 상실감에 시리고 쓰라렸다.

그 상처는 졸업할 때까지 길고 어두운 그림자처럼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진학 때문에 상경한 뒤에도 가끔 그의 소식이 들려왔다.

생각보다 이른 나이에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조금 서운했지만, 그래도 잘 지낸다니 다행이라 여겼다.

그러던 어느 여름, 고향에 들른 날 우연히 다시 마주쳤다.

이미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그는 선을 명확히 긋지 못한 채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 순간,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던 마지막 아련함마저 흩어져 버렸다.

어떤 인연은 마음속에만 머물 때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아픈 기억이었지만, 그 상처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서로를 지켜내지 못하며 겪어야 했던 모든 실패와 흔들림은 결국 내게 필요한 성장의 과정이었다.

그래서 가슴 떨림을 처음 가르쳐 준 인연 만은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아마 그날 밤 그를 외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오래전 그 밤을, 마음 한구석에서 은은한 빛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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