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정말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거창한 목표도, 대단한 결심도 없었습니다.
그저 아이와 놀아주는 하나의 방법이었을 뿐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첫째 아이인 딸과는 그렇게 많이 놀아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반면 둘째는 아들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리고 의도적으로 몸을 쓰는 놀이를 함께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 기억 중 하나가 바로
‘엘리베이터 오르기 vs 계단 오르기’였습니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사실 별거 아닙니다.
아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저는 계단을 뛰어오르는 단순한 시합입니다.
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꽤 진지한 경기였습니다.
아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게 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즈음(안전성이 확보되었을 즈음), 이 놀이는 본격적인 ‘대결’이 되었습니다.
그 무렵 저희는 아파트 10층에 살고 있었습니다.
게임이 시작되면 저는 아무 생각 없이 계단으로 돌진했습니다.
처음에는 7~8층쯤 올라가면 이미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습니다.
다리는 무겁고,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단숨에 10층까지 올라가게 되었고, 더 올라갈 여력까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사람 몸이란 참 묘합니다.
고생을 시키면 시킬수록 '아, 이게 기본이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저도 몇 번은 인생을 돌아봤습니다)
게임 방식은 나름 전략적이었습니다.
아들은 1층에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엘리베이터를 3층에 고정해두고, 제가 타이밍을 봐서 버튼을 눌러주면 출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엘리베이터는 출발할 때 약간의 지연이 있습니다.
그 몇 초가 저에게는 황금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그 사이 저는 한 층, 많게는 두 층까지 치고 올라갔습니다.
결과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거의 제가 이겼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어른스럽지 못한 승부욕이었던 것 같습니다만,
그 당시의 저는 꽤 진지했습니다.
“이건 교육이다”
“아버지의 체력을 보여주는 시간이다”
“아들에게 같이 놀아 준 확실한 기억을 만드는 시간이다” 라고 스스로 합리화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놀이는 계속되었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저도 재미있었고, 아이도 즐거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시기쯤,
회사에서 들은 한 강의가 이 놀이를 ‘운동’으로 바꿔놓았습니다.
한 유명 한방병원 원장님의 교양 특강이었는데, 목욕탕에서 하는 잠수훈련과 계단 오르기가 심폐지구력 향상에 매우 좋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확신했습니다.
“아, 내가 지금 아주 과학적인 운동을 하고 있었구나.”
(사실은 그냥 아이랑 놀고 있었던 건데, 갑자기 전문가의 인증을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계단 오르기는 단순한 놀이를 넘어 하나의 루틴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산도 꽤 잘 오르게 되었습니다.
제 고향에는 전주에는 모악산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꽤 많은 분들이 찾는 유명한 산인데, 저는 한 번은 그 산을 43분 만에 뛰어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이 기록을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 더 묻습니다.
“정말요?”
저도 가끔 의심이 됩니다만, 분명 그날은 그렇게 올라갔습니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나이가 60을 넘으면서 하산이 더 무서워졌습니다.
올라가는 건 어떻게든 하겠는데, 내려오는 건 무릎과의 협상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등산은 접게 되었지만, 대신 아파트 계단을 오르는 것이 훌륭한 대체재가 되어주었습니다.
올라갈 때는 운동이 되고, 내려올 때는 엘리베이터가 책임져주니까요.
이보다 합리적인 구조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던 중, 회사 회식 자리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어떤 상사분이 아파트에서 계단을 오르고, 내려올 때는 엘리베이터를 타며 운동을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 나만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구나.”라는 안도감과 함께 동질감마저 들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그 방식을 적극적으로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겨울이나 비 오는 날, 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는 더없이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제가 거쳐 온(거주해 온) 아파트들은 15층, 20층, 16층 등 다양했습니다.
층수에 맞춰 3~4회씩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며 나름 체계적으로(?) 운동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헬스장 한 번 안 가고 꽤 성실하게 운동한 셈입니다.
상당히 경제적(?)이었던 운동 장소였습니다.
평소 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는 BMW족였습니다.
물론 자동차 브랜드가 아니라, Bus, Metro, Walk입니다.
특히 지하철에서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계단은 무조건 오른다'
사람이 많으면 걸어서, 사람이 없을때는 무조건 뛰어서(성향이 I인 저의 기질이 드러납니다).
그야말로 상황에 맞춰 진화하는 계단형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카이런’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높은 건물을 계단으로 오르는 수직 마라톤 대회.
그리고 그 장소가 바로 롯데월드타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저는 잠시 말을 잃었습니다.
“저기를… 계단으로…?”
그리고 곧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그 의구심과 동시에, 묘하게 끌리는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내 체력은 어느 정도일까.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사실 저는 특별한 운동을 해온 사람은 아닙니다.
꾸준히 관리해온 것도 아니고, 타고난 체력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도 한 가지는 있었습니다.
계속 올라왔다는 경험.
실제로 간단한 시뮬레이션을 해본 결과, 꽤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상위 25% 수준'
(AI는, 저의 아파트 16층을 3분 10초에 오른 것을 123층인 롯데타워에 대비하였을때 단순계산시 기록은 22분 10초이고, 체력저하와 고층을 오를수록 산소가 부족한 것을 감안하면 35~45분 정도의 실력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이 정도면 “이 나이에 나쁘지 않다”가 아니라 “이 나이에 꽤 괜찮다”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더욱 저를 흥분시킨 것은 ‘60대 연령대 등위 수준’이라는 예상이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신기한 점이 있습니다.
계단만 보면 뛰어 올라가고 싶어집니다.
누군가와 함께 걷다가 계단이 보이면 속으로 이런 말을 합니다.
“저거… 뛰어오르고 싶지 않니?”
30여년 된 습관입니다.
지하철, 건물, 아파트. 어디든 계단이 있으면 한 번쯤 올라갑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료들은 식사 후 바로 자리로 돌아가 에너지를 충전하지만, 저는 계단으로 향합니다.
각자의 방식이 있는 것이니까요.
이제 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계단을 오르는 사람’입니다.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니고,자격증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계속 오르면 그렇게 됩니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결과만 남습니다.
하지만 계단을 오르면 과정이 남습니다.
숨이 차오르는 순간, 다리가 무거워지는 느낌, 멈추고 싶은 마음과 다시 올라가는 선택.
그 모든 것이 조용히 제 안에 쌓입니다.
물론 걱정해주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다 무릎 다 나간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도 기준을 정해두었습니다.
이상 신호가 오면 바로 멈추기로.
다행히 아직까지는 무릎이 저를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정년퇴직 이후, 인생의 여러 그래프는 조금씩 내려오고 있습니다.
체력도, 경제력도...모든 것이 마이너스의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또 하나 어쩌면 아들로부터 배운 표현인데, 인생의 난이도도 낮아지는 중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당분간은 계속 오를 것 같습니다.
한 계단씩.
2장. <지하철 훈련과 일상 계단 정복기>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