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지하철과 일상 계단 정복기

by 페트라

계단 오르기가 습관이 되고 나서부터 제 일상은 조금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지하철역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에스컬레이터 위치를 찾습니다.

저는 다릅니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자연스럽게 눈이 움직입니다.

‘계단 어디 있지?’

이쯤 되면 본능에 가깝습니다.

지하철은 참 좋은 훈련장입니다.

심지어 무료입니다.

그리고 날씨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도망칠 수도 그만둘 수도 없습니다.

한 번 올라가기 시작하면 끝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어도 뒤에서 사람들이 계속 올라오기 때문에 체면상이라도 계속 올라가야 합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헬스장에서는 포기해도 아무도 뭐라 안 합니다.

하지만 지하철 계단에서는 다릅니다.

중간에 멈추는 순간, 뒤에서 올라오는 사람들과 어색한 아이컨택이 발생합니다.

‘여기서 멈추면 민폐다’

이 생각 하나로 한 층을 더 올라가게 됩니다.

이건 운동이 아니라 거의 사회적 압박 기반 트레이닝입니다.

서울 지하철에는 유난히 계단이 많은 역들이 있습니다.

일종의 ‘계단계의 끝판왕’ 같은 곳들입니다.

대표적으로 이런 곳들이 있습니다.


고속터미널역

서울역

종로3가역

사당역

광화문역

버티고개역...


이 역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깊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고속터미널역은 처음 가보신 분들은 당황하실 수 있습니다.

환승 한 번 하려고 내려갔다가 “나 지금 지하 몇 층까지 내려온 거지?”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올라올 때는 더 심각합니다.

거의 ‘지상으로의 귀환’ 수준입니다.

서울역도 만만치 않습니다.

지하철, 기차, 공항철도까지 연결되어 있어서 동선이 길고 깊습니다.

잘못 걸리면(?) 계단 몇 세트는 기본입니다.

그날은 운동 따로 안 하셔도 됩니다.

이미 하신 겁니다.


종로3가역은 환승의 미로입니다.

길을 잘못 들면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계단은 보너스로 계속 등장합니다.


사당역은 또 다른 스타일입니다.

유동인구가 많아서 속도를 마음대로 조절하기 어렵습니다.

앞사람 속도에 맞춰야 합니다.

이게 은근히 힘듭니다.

느리게 가면 지루하고, 빠르게 가고 싶어도 못 갑니다.

결국 속으로만 외치게 됩니다.

“비켜주시면 제가 먼저 힘들겠습니다.”


광화문역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는 계단이 특징입니다.

“이쯤이면 끝이겠지?” 싶을 때 한 번 더 나옵니다.

이건 거의 심리 테스트입니다.


버티고개역은 이름부터가 남다릅니다.

“버텨라. 무조건”

길이 좁고 사람이 적어 도둑이 자주 출몰하기때문에 조선시대 순라꾼(경찰)이 도둑을 쫓으며 외친 번도(番盜)라는 말이 변천하며 유래되었다지만 현대 계단족에겐 버티라는 의미같네요.


실제로 깊이가 상당해서, 올라가다 보면 인생의 선택들을 하나씩 떠올리게 됩니다.

이 외에도 공덕역, 디지털미디어시티역 같은 곳도

환승 동선이 길어서 체력 테스트를 하기에 충분합니다.


저희 집 근처역 수지구청역은 계단수가 많지는 않지만 제가 가장 많이 오르내린 지하철역입니다.

왜냐 하면 제가 지하철 이용시, 특히 낯시간대는 지하철 배차 간격이 길기때문에, 전역이나 전전역에 지하철이 있을 경우 계단오르기(물론 에스컬레이터로 내려오기) 2~3회 반복이 가능합니다.


이럴때면 저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사람이 있고, 저 또한 조금 머쓱합니다만 이제는 굳은 습관이 되어 지하철을 기다리는 시간은 이렇게 보내기가 일쑤입니다.

이런 식으로 역들을 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실력이 늘어납니다.

처음에는 중간에 멈추고 싶습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습니다.

뒤에서 사람들이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냐면, ‘참는 능력’이 생깁니다.

저도 처음에는 여러 번 멈췄습니다.

벽에 기대서 숨을 고르고, 괜히 휴대폰을 보는 척도 했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안 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멈추는 횟수가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계단을 보면 조금 반가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분명 정상은 아닙니다.

보통은 피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합니다.

“오, 오늘은 몇 층짜리인가?”

이쯤 되면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넌 상태입니다.

지루함을 이기는 방법도 생겼습니다.

저만의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오늘은 한 번도 안 멈추기, 손잡이 안 잡고 올라가기, 마지막 10계단은 속도 올리기...

이런 사소한 규칙들이 훈련을 계속하게 만들어줍니다.

어느 날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계단을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는데, 앞에 계시던 분을 추월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상한 책임감이 생겼습니다.

“이제 멈추면 안 된다.”

괜히 먼저 앞질러 놓고 중간에 퍼지면 체면이 안 서는 느낌이었습니다.

결국 끝까지 갔습니다.

계단이 아니라 자존심으로 올라갔습니다.


비 오는 날도 기억에 남습니다.

계단이 약간 미끄러웠습니다.

평소보다 더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날은 속도를 줄였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빠른 게 중요한 게 아니구나.”

안 다치고 끝까지 가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렇게 지하철 계단은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줬습니다.

체력만이 아니었습니다.

페이스 조절, 상황 판단, 그리고 약간의 눈치까지 말이죠.

이제 저는 압니다.

지하철 계단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는 귀찮은 길이지만, 저에게는 훈련장입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에스컬레이터를 탑니다.

그렇지만 저는 계단으로 갑니다.

약간은 따갑습니다. ('별난 사람이구만'하는 소리가 귀를 때립니다)

서로 이해할 수 없지만, 각자의 길을 가는 겁니다.

가끔 이런 우스꽝스런 상상을 합니다.

지하철에서 방송이 나옵니다.

“오늘도 저희 계단을 이용해주신 고객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럼 저는 속으로 대답합니다.

“제가 감사합니다.”


이제는 확실합니다.

지하철 계단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오를 수 있고, 누구나 지나치는 공간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다릅니다.

저는 계단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계단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곳은 제가 처음으로 “계속할 수 있다”는 감각을 얻은 장소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지하철 입구에서 저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립니다.


“계단 어디 있지?”


3장. <아파트 계단 훈련의 기록>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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