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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필로 살다가 캘리로 승천

잡스! 감사해요

by 페트라

저의 핸디캡 중 하나는 악필입니다.

지금 시대에 태어났기에 망정이지 신언서판(身言書判)이 한 사람에 대한 판단 기준인 과거에 태어났다면 큰 낭패를 볼 뻔했습니다.




언제부터 왜 악필이 되었는지는 정확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나마 연필글씨의 사촌격인 붓글씨는 제법 썼던듯한데... 지금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시절 학급 게시판에 더러 붙기도 했는데 말이죠.




저는 그래서 저의 손글씨 보이기를 꺼려합니다.

학교 수업에서도 직장생활 회의에서도 옆 사람에게 보이기 싫어 가리고 쓰거나 노트를 들어 이상한 형태로 글을 썼습니다.

그러다보니 제가 써 놓고도 무슨 글인지 모르는 경우가 있어 나중에 정확한 내용을 확인하느라 애먹은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저의 딸은 “아빠 글씨정도면 전혀 이상하지 않은데... 오히려 잘 쓰는 편이야”라며 응원의 한 마디를 건넵니다.

아마 딸의 위로는 손글씨를 쓰지 않는 요즘 기준으로 볼 때 아빠를 위로하기 위하여 하는 말 같습니다.

지금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도 손글씨는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중요한 소통 방법인 듯합니다.




저는 엉성한 필체에도 불구하고 1년에 두세 번은, 정말이지 무슨 배짱인지, 손편지를 쓰곤 합니다.

십여 년 전쯤이었을까요.

돌아가신 아버지께 꽤나 정성을 들여(자를 대고 줄을 맞추고, 정자체를 쓰려고 아주 천천히 썼죠) 두 장의 편지를 썼죠.

그 것을 보신 어머니께서 “왜 나한테는 안 쓴거냐?”며 시샘을 하셔서 다음 해에는 심혈을 기울여 쓴 적이 있고, 장인 장모님께도 그랬습니다.

몇몇 친구에게도 손편지를 썼는데 이때는 많은 글자 쓰는 것이 어려워, 힘든 이 시간을 줄이기 위해 엽서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아날로그 감성 열풍과 함께 타인의 손글씨를 보며 위안을 얻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유튜버는 반듯반듯한 글씨체로 엄청나게 많은 구독자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하지요.

‘나인’이라는 분인데, 제가 영상을 접한 때는 조회수가 1,573만회였고, 영상에 달린 댓글이 15,790개나 주렁주렁 열려 있었지요.

그 분의 다른 영상도 봤는데, 이 분이 써 내려가는 문구는 특별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인기 영화나 드라마의 명대사, 시 구절, K팝 가수의 가사 등이 전부였고 딱히 특별한 내용은 없었어도 ‘글멍’ 때리기에 좋았습니다.

영상마다 달린 댓글들에는 기분이 좋아졌다는 글부터 위로받았다는 등의 여러 가지 반응이 줄을 이었습니다.

캘리2.jpg


기억해보면 저는 악필을 극복하기 위해 이상한 노력을 하기도 했습니다.

대학 시험은 논술이 많았기 때문에 제 논술 답안지는 세네가지 색깔의 볼펜을 사용한 적도 있었습니다.

또 제 글씨는 쓰다보면 자꾸 위로 올라가거나 아래도 처지는 경우가 있었기에 자를 대고 수평을 유지하며 답안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악필의 대체적인 공통점은 글씨 쓰는 속도가 느리다는 것입니다.

느린 글씨를 커버하기 위해 제 논술에서 핵심이라고 생각된 곳은 자를 대고 밑줄을 긋기도 했지요.




아마 제 답안을 보신 몇몇 교수님들은 ‘보기와는 달리 성격이 이상한 학생’이라고 생각하셨을 듯합니다.

그리고 또 그랬을 것입니다.

어떤 교수님들은 항상 안경을 벗고 눈을 비비며 보셨을 것입니다.

“이건 고대 상형문자야?! 아니면 암호문이야?!”




‘천재는 악필이다’라는 말이 있지요.

필체는 뇌의 흔적이라는 주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국내 1호 필적학자’로 유명한 구본진 법무법인 로플렉스 대표는 자신의 저서 <필체를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에서 필적은 ‘뇌의 흔적’이자 ‘몸짓의 결정체’라고 합니다.

“의식적으로 글씨체를 바꾸면 성격이 변하고 성격이 바뀌면 행동 패턴이 변하며 행동 패턴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는 주장도 곁들이지요.

즉 뇌가 생각하는 것을 손으로 적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재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뇌에서 생각하는 것을 손이 따라갈 수 없기에 악필을 쓴다는 것이구요.

천재들은 순간적으로 뇌에 번뜩인 많은 생각들을 빨리 쓰려고 하다보니 악필이 된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영리하지도 않으면서 왜 악필일까요.

저의 손글씨 가리기에도 불구하고, 제 글씨가 남에게 보이면 저는 ‘표구체’라고 너스레를 떨곤 합니다.

지렁이가 먹물을 머금고 나와 그린 그림이고, 그래서 표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글씨라고 멋쩍은 웃음을 짓습니다.




학창시절 저의 핸디캡인 글씨를 바꾸려 방학 때를 이용하여 펜글씨 학원에 예닐곱 번 등록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방학은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기 때문에 저의 악필 글씨체가 고쳐질만 하면 개학을 하여 수업현장에 들어가면 빨리 써야 하기 때문에 도로 악필체로 돌아오곤 하는 악순환을 거듭했습니다.




정년퇴직을 하고 시간이 많이 주어진 지금이야 다시 펜글씨 학원에 등록할까도 생각했지만, 차라리 캘리그라피를 배워 표구체의 핸디캡을 극복해볼까 생각도 합니다.



제가 캘리그라피를 배우고 싶다고 생각한 계기는 몇 해 전 저의 아들이 어버이날 선물과 함께 보내준 편지 겉봉에 쓰인 캘리글 덕분이었습니다.

그 때부터라도 시작했으면 되련만, 업무에 바쁜 것을 핑계로 계속 미루고 미루다 지금까지 왔습니다.

아들에게 얼만큼 연습하고 쓰면 이렇게 할 수 있냐고 물어보니 몇 번 연습한 이후에 썼다고 하더라구요.

해서 자신감도 생겼습니다만, 실행력이 부족한 저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많이 주어진 지금에도 캘리 배우기를 시작하지 못하고 이렇게 희망의 글만 뇌까리고 있습니다.



저는 왜 실행력이 없을까요.

또 어느 계기가 되어야 제대로 배우기 시작할까요.

제 실행력 부진을 깨기 위하여 다음 주부터 J평생교육원에 캘리반 수업을 신청하였습니다,

설레는 마음도 가져봅니다만, 제가 워낙 뭘 배우는데 진도가 느려 도중에 관두지 않을까 걱정도 됩니다.

작가님들! 그리고 이 곳을 방문하시는 분들!

저의 꾸준한 학습을 위해 응원해주시기 바랍니다.



퍼스널 컴퓨터의 개발과 관련이 있는 캘리그라피!

무슨 말이냐구요?

“만약 캘리그라피 수업을 받지 못했다면 지금처럼 화려한 폰트를 활용해 개인용 컴퓨터를 개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실제 스티브 잡스가 했던 말입니다.

제가 영어 통문장 외우기를 위해 본 잡스의 스탠포드대학 졸업 축사에서 자신이 대학교 시절에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했던 calligraphy수업이 이후 자신의 인생에서 대단히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요.




저는 믿어봅니다.

캘리를 배우는 순간 글씨 못 쓰는 사람이 예술로 포장될 것이라고...

저의 글씨는 재앙이 아니라, 아직 액자에 들어가지 않은 예술품이라고...




하여튼 캘리로 손편지를 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그 날이 되면 악필의 제 핸디캡은 그야말로 승천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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