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서른다섯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크로크무슈 Aug 26. 2024

맥주는 달지도 쓰지도 않았다


새로운 맥주 브랜드를 런칭한 탓에 아주 정신없는 여름을 보내고 있다. 콜라보레이션이니 팝업이니 페스티벌이니 죄다 주말에 열리는 행사라, 7월과 8월의 캘린더 속 주말은 진작에 출장 일정으로 가득 차버렸다. 출장으로 멀리 오고 가는 것은 분명 고역이지만 출장 자체를 싫어하진 않는다. 눈치를 보지 않고 약간은 거만한 자세로 앉아 이동하거나, 평소에 먹어보고 싶었으나 가격이 부담되는 음식들을 출장비로 먹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당연히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보다 낫다.


여름을 좋아하는 편이다. 여름이라는 계절이 주는 열정적인 더위, 넘치는 생명력, 휴가에 대한 기대감, 파란 하늘이나 구름 같은 상징적인 감촉과 감정들이, 지금의 회사로 이직한 뒤로는 점점 무뎌지고 있어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크다. 얼마 전에는 양양으로 출장을 다녀왔다. 전국에서 미모가 출중(?)하고 좀 놀 줄 안다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그곳 말이다. 술이라는 카테고리를 전개하는 탓에 술과 관련된 좋은 점보다는 그 반대의 경험들을 자주 접하는 편인데, 이번 양양 출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랬다. 바닷가와 휴가라는 지리적, 시간적 요소가 섹스어필이나 생물학적 본능에 자극을 주는 것일까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도 했다.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는 사람, 지나가는 여자는 일단 붙잡고 보는 대다수의 남자들, 시끄러운 음악에 헐벗은 남녀들. 술과 음악은 어찌 보면 아주 건전한 일탈이기에 나무라는 것은 아니지만서도 저런 모습들을 쳐다보고 있는 것도 꽤 고역이었다. 주변에서는 국내 휴양지 이곳저곳을 누비고 있으니 즐거워 보인다는 말을 자주 한다. 나도 그 기분을 놓치고 싶진 않아서, 짬을 내어 바닷가를 걷는다거나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기분 전환을 시도해 보았다. 그럼에도 올해의 여름은 그저 행사의 계절이었고 그 맛있다는 여름 맥주는 노동주에 가까웠다.


-


오후 11시 50분. 겨우 십 분을 남겨두었을 뿐이지만 자정을 넘기지 않았음을 안도하며 기차에서 내렸다. 사흘간 이어진 강원도와 부산 출장에 무거워진 몸과 짐을 이끌어 집으로 향했다. 현관의 도어록을 누를 손이 없어 회사 노트북을 잠시 바닥에 팽개치고서야 띠띠띠 문을 열고 들어섰다.


찰칵,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 집 냄새.


아늑하다. 9평이 조금 안 되는 원룸. 딱 그 정도의 아늑함일지라도 강원도와 부산에서 달고 온 피로를 내려놓기엔 충분했다. 아파트로 이사 가면, 집이 넓어지면 더 아늑할까 싶다가도 전세 계약을 연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이 떠올라 금세 잊었다. 비를 맞은 탓에 신발과 하나가 되어 있었던 발을 겨우 빼내고, 땀인지 비인지 모르게 젖은 옷을 벗어 세탁기에 던져 넣고 돌려버렸다. 긴 하루를 보낸 날에는 그날 입은 옷을 바로 세탁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날의 피로와 기분을 세탁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반영된 게 아닐까.


샤워를 하고 나오니 조금은 기분이 풀렸다.


며칠 동안 정신없는 밤낮을 보내느라 나 자신을 돌볼 시간이 없었는데, 문득 스스로 가여워져 냉장고를 열어 맥주 캔을 하나 꺼냈다. 괜히 마음에 드는 잔에 마시고 싶어 런던에서 사 온 맥주잔을 꺼냈다. 거품이 적당히 오르도록 맥주를 따라낸다. 조용한 방에 맥주를 따르는 소리만 채워진다. 예전에는 혼자 사는 집이 그렇게 외롭고 쌀쌀하여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자주 전화를 하곤 했었는데, 이제는 누군가로부터의 위로 한 마디보다 맥주의 첫 모금이 주는 위로가 더 와닿는다. 몸이 시원따뜻해지는 건 덤.


오늘의 맥주는 달지도 쓰지도 않았다.


이번 출장은 일도 일상도 여러모로 힘들었다. 오랜 기간 준비했던 행사는 당일 우천으로 취소된 탓에, 귀에서 휴대폰을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수십 명과 전화로 싸우고, 애원하고, 설득하고, 화내었다. 다행히 기적처럼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앞선 우여곡절 탓에 진행이 매끄럽지 않았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까지도 프로답게 척척 해내고 싶지만, 표정과 목소리에 당황스러움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허둥거린 내 자신이 싫었다. 와중에 집주인은 떨어진 집 시세만큼의 전세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다며 연락이 왔고, 엄마는 누나와 다투었는지 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다며 한참을 전화로 푸념 섞인 잔소리를 했다. 잘해보려고 했던 이성과는 사소한 오해가 생겨 다투다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전부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음을 우리 모두는 다 잘 알고 있기에 눈앞의 일에만 집중해 겨우 시간을 버텨냈다. 사실 때려치우기에도 꽤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는 보통 통장 잔고에서부터 나온다. 뭐 그렇다고.


이럴 때는 리스본이며 카프리며 니스며, 살아본 적도 없는 곳이 그립다.


-


열심히 거품을 밀어 올리는 달지도 쓰지도 않은 오늘의 맥주를 멍하게 바라보며, 오늘의 기분을 이렇게 마무리할 수 없어 이번 출장에서 마주친 기분 좋은 순간들을 애써 떠올려보았다. 기차에서 캔 음료를 마시며, 혹여나 캔 소리가 시끄러울까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옆자리 승객의 배려에 고마웠다. 강릉에서는 앉은자리에서 한 판을 다 먹어버린 치즈가 가득 올라간 피자가 그리워졌고, 부산의 지하철에서는 커플이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옮겨 두 자리를 나란히 비워준 지하철 승객 덕분에 괜히 내 마음이 따뜻해졌었다. 이번 일정 내내 불규칙적인 소나기가 많이 내렸는데, 그 탓인지 사람들이 장화를 많이들 신고 나왔다. 개인적으로 장화를 신은 사람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장화를 신어본 적은 없지만 장화 특유의 걸음걸이가 꼭 오리 같아서, 오리에게 긴 다리가 생기면 저렇게 걷지 않을까 상상하곤 했다. 얼마 전 회사 동료가 장화를 신은 모습이 귀여워서 아톰 같다며 놀리기도 했었다.


마지막으로 조용한 내 집에 들어서는 순간이 좋았다. 조용한 실내, 익숙한 물건들. 집 안을 잘 둘러보면 새로운 물건 거의 없다. 대부분의 가전과 가구들은 부산에서부터 가지고 올라온 것들이다. 잘 찾아보면 미국에서 돌아오며 가져온 물건들도 있다. 지금까지 대여섯 번의 이사를 다녔음에도 매번 내 집이라는 생각에 금세 애정이 생기는 이유는 이렇게 나에게 익숙한 물건들 덕분이다.


기분이 풀린 탓일까, 달지도 쓰지도 않은 맥주 맛을 이유삼아 아껴두었던 치즈를 꺼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회 속 빌런, 나를 단단하게 만든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