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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로크무슈 Sep 22. 2024

경유지에서 돌아온 까닭


갈망하는 것들은 항상 나와 무관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린다. 어릴 때는 인간관계나 입시, 구직활동들이 그랬다. 강렬하게 바라는 것들은 매번 나를 비켜갔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다는 간단한 논리를 이렇게 깨우쳤다. 나에겐 사랑이 특히나 그랬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날 좋아하지 않으며,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은 나의 관심에 들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겠지만, 나는 심지어 나조차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다.


주변인들이 내가 스스로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며 핀잔을 줄 때가 있다. 이루어낸 것들을 감추고 자조한다. 쓸데없이 예의를 차리거나 미안한 게 없는데도 사과가 입에 배어있다. 과할 정도로 나를 낮추며 살아왔다. 얼마 전 대학원에서 우연히 자기소개를 하는 자리였다. 내가 하는 일과, 해온 것들을 간단하게 소개하며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런 문장을 덧붙였다.


"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겉절이입니다."

"이런 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에이, 제가 하면 아무나 할 수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 저건 겸손이라기엔 지나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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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휴가였다. 이집트로 가던 중, 경유지에서 돌연 집으로 돌아왔다. 이유 없이.


지금의 회사는 겨울 휴가가 있다. 크리스마스를 끼고 앞뒤로 연차를 며칠 붙이면 꽤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는 날짜가 만들어져서, 휴가 시즌이 가까워오면 항공권 가격비교 어플을 습관처럼 들여다본다. 지난 겨울은 딱히 가고 싶은 곳이 없었음에도 무리해서 여행지를 찾아보았다. 항공권 어플의 목적지 선택란 어느 날에는 이탈리아였다가, 다음 날은 오키나와였다가, 또 핀란드였다가, 결국 '어디든지'로 바뀌었다. 휴가 나흘 전이 되어서야 이집트행으로 결정되었다.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음에도,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기어이 발권했다.


경유지는 도쿄였다. 가볍게 이틀을 여행하다가 이스탄불을 거쳐 카이로로 들어가는 일정이었는데, 도쿄는 여러 차례 방문했음에도 여전히 좋았다. 12월 치고는 선선한 날씨에 가볍게 맥주나 한잔할 요량으로 거리를 거닐었다. 여러 가게가 있었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자리도 충분했다. 문간에서 들어가려다 멈칫한 후 다시 거리로 튕겨져 나오길 반복했다. 세 번쯤 그랬을까. 불현듯 나는 지금 딱히 맥주를 마시고 싶지 않다는 것과, 사실은 여행을 떠나오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나 자신을 속여가며 떠나온 이유는 명확했다. 휴가기간 동안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아서, 오기 힘든 곳으로 여행 왔다며 자랑하고 싶어서.


순간 몰려온 환멸감에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길로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서울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평소보다 두 배의 가격이었음에도 고민하지 않았다. 창문에 비친 내 모습조차 보고 싶지 않아 복도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와 일주일이 넘도록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며칠간은 전화기를 꺼두기도 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날 손가락질 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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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연장선에서 팔로우를 하고 있는 여자 아이돌이 있었다. 다재다능하고 늘 자신감에 차있는 모습이 매력적인 외국인 아이돌이다. 한 번은 SNS를 통해 팬들과 소통하는 콘텐츠가 있었는데, 한 팬이 '행복해지는 법을 알려주세요'라는 다소 상투적인 질문을 던졌다. 답변은 꽤 단순했고, 당당했다.


'자기를 미칠도록 사랑해 봐'


내가 세상에서 제일 어려워하는 것을 이토록 간단하게 드러낼 수 있다니. 존댓말이나 맞춤법에 개의치 않는 모습마저 자기애가 충분히 느껴져 멋있었다. 이후 단편적으로 모니터링한 그 아이돌은 뭘 하든 당차고 생기 있어 보여서, 자기를 미치도록 사랑하면 저런 모습일까 싶어 나름 노력해보고자 했다. 아기 수준으로 나를 칭찬해보기도 하고, 말이나 글에 긍정적인 단어만을 사용해보기도 했다. 외모를 가꾸면 좀 나아질까 싶어 피부관리도 받아봤다. 운동도 하고 있다. 좋은 회사에도 들어갔다. 비싼 물건을 사보기도 했다.


나아지는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자기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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