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님, 양심 고백합니다. 제 뇌는 절여져 있어요.
글 쓴다고 해놓고 책을 안 읽어도 너무 안 읽는다. 책은 수면 보조 도구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이 때문에 글 쓸 자격이 있나 혼자 고민도 했다.
"음악 하는 사람 중에는 본인도 모르게 영향받을까 봐 다른 아티스트 음악을 의식적으로 안 듣기도 한다던데...?" 하며 자기 합리화를 하려고 했지만 물론 헛소리다.
어휘력이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말할 때도 중언부언하는 일이 많아졌다. 한동안은 월별 독서 KPI를 정해두고(지독한 직업병) 책을 읽어보기도 했다. 생각한 것보다 빨리 읽어나갔다. 얇고 읽기 쉬운 책만. 두껍고 읽기 어려운 책들은 여전히 책장 속에 고이 모셔만 두고 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정말 책벌레였다. 특히 소설을 좋아했다. 조금만 읽고 공부해야지, 조금만 읽고 자야지 하다가도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순식간에 끝을 보곤 했다. 공부하라고 주어진 자습시간에도 감독 선생님 몰래 책을 읽는 스릴을 즐겼다.
그냥 공부하기 싫어서였을까?
유튜브, 넷플릭스, 왓챠, TVING
지금 내가 구독하고 있는 OTT 서비스들이다. 월에 나가는 구독료만 해도 티끌모아 태산이 될 판이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퀄리티 훌륭한 영상들이 후두둑 쏟아져 나온다. 책은 활자를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도록 해주지만, 영상은 그럴 필요가 없다. 이미 시각화된 이미지들이 눈을 통해 뇌까지 즉각적으로 전달된다.
책에 비해 머리를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그게 좋아서 영상을 보는 거긴 한데)
출근길 지하철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침대 위에서, 손가락은 자연스레 휴대폰의 OTT 앱을 누른다. 보고 싶은 영상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다분히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인 행동이다. 나는 요즘 이런 내 모습을 '뇌가 인스턴트 미디어에 절여져 있다'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영상 시청시간을 줄이려고 노력한다. 차라리 음악을 더 듣고, 글 쓰는 시간을 늘린다. 책만 읽었다 하면 잠이 오는 터라 아직 독서의 비중을 키우진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글을 쓰다 보면 독서가 정말 중요하다는 걸 느낀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과 하고 싶은 말을 온전히 표현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풍성한 어휘와 문장, 깊이 있는 구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글 쓰는 걸 좋아한 적이 있긴 했나? 없는 기억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과거를 더듬어봤다.
어렸을 때 친구 한 명이랑 같이 교환소설을 썼던 적이 있다. 당시 작가 귀여니를 주축으로 '인터넷 소설'이라는 것이 엄청난 흥행을 이룰 때였다. 친구와 썼던 소설에서 일진짱이 등장했었는지는 기억도 안 나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지만, 어쨌든 일기는 쓰기 싫어했던 주제에 소설 쓰는 거엔 확실히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때인가 2학년 때는 국어시간에 쓴 독후감으로 반 친구들 앞에서 선생님께 칭찬받은 기억이 있다. 선생님께서는 내게 청출어람이라는 아주 어깨 으쓱해지는 극찬을 하시며 글 쓰는 재주가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하지만, 난 곧 마의 15살이 되면 대부분 겪는다는 중2병이 단단히 와버리는 바람에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쥐가 파먹은 듯한 처피뱅을 하고 교실에 나타나 선생님께 큰 실망을 안겨드렸더랬다. 수업시간에 나를 보고 애가 왜 저렇게 됐냐며 물으시던 선생님의 안타까운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이후 한참 동안 글쓰기와 먼 삶을 살았다. 특히나 대입 수시 논술전형을 준비하면서 작문이 조금 싫어졌다. 수시에 전부 다 떨어지고 나니 그냥 재능이 없나 보다 싶었다. 대학교 때는 전공서적 읽기도 벅찼다. 취업을 준비하면서는 책은 사치요, 작문이라고는 자소설을 창작하는 것뿐이었다.
오히려 취업 후에 수많은 이메일과 보고서, 제안서를 작성하면서 글 쓰는 방법을 알게 됐다. 다분히 직장인스러운 글들이었지만 적어도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정리해서 활자로 표현하는 것엔 어느 정도 자신이 붙었다.
어떻게 하면 글을 읽는 상대방이 쉽고 정확하게 요점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적었던 시간들이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회사에서 업무를 하던 중, 브런치 작가로 선정되었다는 알림 메시지를 받고 너무 기쁜 나머지 고라니 울음소리를 내며 온 사무실을 뛰어다닐 뻔했다.
중학교 때 선생님께 받았던 칭찬이 떠올랐다. 글은 쓰는 것 자체도 의미 있지만 누군가가 읽어줄 때 더 큰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는데, '읽을만한 글'로 인정받은 것 같아 행복했다.
자칭 타칭 샤이(shy)관종인 나로서는 이만큼 알맞은 기회가 없었다. 글을 쓸까 고민만 했던 지난 몇 년이 머릿속을 스치며 조금 더 일찍 시작해볼 걸 하는 약간의 후회만 들었다. 가끔 기가 막힌 문장이 떠오를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기가 막히게 휘발되어 버렸다. 휘발. 아깝다. 적어둘 걸.
요새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있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 줄여서 '스우파'. 출근길마다 나의 내적댄스를 책임져주는 고마운 프로그램이다. 스우파에는 훅(HOOK)이라는 크루가 나온다. 댄서 아이키가 수장이 되어 본인의 제자들과 함께 꾸린 크루인데, 훅의 춤에는 늘 특유의 유머러스함이 묻어 나온다.
내 글도 훅의 색깔 같았으면 좋겠다. 고민은 무겁게, 글은 가볍게. 읽는 사람이 중간에 지치지 않게 유머도 한 스푼 넣고.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혼자서만 끙끙 앓지 않도록 따뜻한 공감을 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아무튼 오늘의 결론,
책 안 읽어도 글 쓸 수는 있다. 하지만, 뇌 절여짐 방지를 위해서라도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
이만 자기반성의 일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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