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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직요괴 Oct 14. 2021

싫증내기 전문가

나는 배 아픈 이직요괴다

한 우물을 깊게 판다는 말이 있다.


나는 여러 우물을 얕게 파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뭐든지 싫증을 잘 내는 편이다. 유일하게 꾸준한 건 꽂힌 음식 하나를 질릴 때까지 먹는 것, 혹은 싫증 내는 것?(주변 사람들은 내가 꽂힌 음식을 먹는 걸 보며 질려버린다)


어느 날 곰곰이 생각해봤다. '난 어떨 때 하던 일에서 흥미가 떨어질까?' 잠시의 고민 끝에 마음 깊은 곳에서 솔직한 대답이 나왔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을 봤을 때


'앞으로 얼마만큼이나 더 열심히 해야 저렇게 될 수 있을까'하며 보이지 않는 벽을 느낄 때. 한 마디로 남 보고 배 아플 때였다.


늘 포장해왔다.

"나는 팔방미인형 인재야. 한 가지를 잘하는 것도 좋지만 여러 가지를 잘하는 것도 나쁘진 않아. 어떤 일이 주어지더라도 해낼 수 있는 걸?"


하지만 한 편으로는 분명 한 우물을 깊게 파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사람들을 동경해오고 있었다. 그것은 곧 내가 갖지 못함에 대한 유치한 질투와 시기의 마음이 되어버려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괜히 흐린 눈만 치켜뜨기도 했다.




지금은 종영한 '싱어게인'이라는 프로그램을 재밌게 봤다. 최종 우승자가 된 이승윤 가수가 30호로 불려지던 때 본인을 표현했던 '나는 배 아픈 가수다'라는 말이 마치 나의 마음을 대변한 것처럼 인상 깊게 남았다.

(물론 여기서 배 아픈 건 그 배 아픈 게 아니고 대변도 그 대변이 아니다)


본인의 애매한 역량이 한계로 느껴질 때, 뚜렷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다른 가수들이 부러워 일부러 외면하기도 했다는 그의 솔직한 답변이 내 안에 숨어 있던 찌질함을 밖으로 끌어내 주었다.


결국 30호 가수 이승윤은 경연에서 우승을 했다. 내가 보기엔 그의 역량과 재능이 절대 애매하지 않았다. 매 무대를 감탄하며 보고, 그 희열을 계속 느끼고 싶어 보던 영상을 되새김질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런데 그는 왜 본인 스스로를 '애매한 경계선에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했을까? 단순히 장르적인 부분에서만 그렇게 생각한 걸까?


순전히 내 생각일 뿐이지만,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이 너무 높은 게 아닐까 싶었다. 남들에게는 충분히 대단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대하는 나의 모습에 미치지 못하면 애매하다고 판단해버리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그 애매함이 곧 싫증으로 이어졌다. 너무나도 즐겁던 일이 지루해졌고, 나를 움직이던 의지와 원동력은 신기하리만치 한 순간의 허상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지루하다는 건 착각이었으며, 노력에 대한 두려움과 게으름이 그저 나의 한계를 스스로 설정해버린 것이었다.


이승윤 가수 역시 비슷한 고민과 위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포기 직전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도전에서 지금의 성취를 얻어냈다. 그의 입장에 나를 대입해보자면,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애써 피해오던 내면의 두려움에 맞선 것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깨달은 게 생겼다. 처음부터 최고가 될 필요는 없다는 것.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그동안의 내게는 당연하지 않았다.


점점 과정보다 결과가 중시되는 사회에서 '최고보다 최선'이라는 건 순 멍청이들만 하는 말이라는 어리석은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길은 주어진 게 아니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최선을 다한 하루가 앞으로 나아갈 길의 한 조각이 된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으니 꾸준하게 하는 것이 절대 바보 같은 일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긴다.


그리고 요즘 나는 의식적으로 되뇐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 아니, 이 정도면 괜찮아. 너무 잘했어.


게으른 완벽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주문으로 이보다 더 좋은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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