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참 날씨도 좋네
사고 쳤다. 말이 씨가 됐다.
지난 글에서 아래 같은 부제목을 적을 때만 해도 진짜 농담이었다. 아 물론 퇴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정도는 웬만한 직장인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을 테니까!
결이 맞는 조직을 찾기가 이렇게까지 어려울 일인가 싶다. 일이 좋으면 사람이, 사람이 좋으면 일이 나를 괴롭히는 이 지독한 뫼비우스의 띠를 벗어나는 게 가능하긴 한가?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서 일은 좋았다. 마음 맞는 동료들과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게 그렇게 큰 욕심이었던 건지.
이번에도 방향을 잘못 튼 선장이 운행하는 배에 타고 있던 나는 눈앞에 지도와 나침반까지 들이밀어가며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수도 없이 알렸지만, 세이렌에 홀린 것처럼 좌초를 자처하는 선장의 모습을 보며 매일 점점 지쳐갔다.
이직을 반복한 사람은 떠나는 것도 쉬울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퇴사가) 아무리 중독적이라고 해도 퇴사하기 위해 입사하는 사람은 없다. 항상 조금이라도 나은 환경에서,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일하고 싶다는 희망으로 선택했던 이직이었기에 말처럼 쉽게 퇴사를 마음먹을 수는 없었다.
이루어놓은 것들이 아까웠다. 이번엔 진짜 적당히 일해야지 해놓고서는 또 마음을 다 쏟았나 보다. 하나하나 내 손이 닿지 않은 것들이 없는 일에서 손을 떼려니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러니까 진짜 내 일도 아닌데 뭘 그렇게 최선을 다했어?' 이렇게 10년만 더 지나면 난 염세주의의 끝판왕이 되어있을 것 같다.
게다가 지난 퇴사 경험들로 인해 회사 밖이 춥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다. 이제 곧 겨울이 오는데 심지어 내 나이는 3n살이다. 돈벌이 구실도 마련 안된 주제에, 허리띠를 있는 대로 조이면 당장 몇 달은 살 수 있을 돈이나마 겨우 손에 쥔 채 아주 호탕하게 그만둬버렸다.
사람이 너무 대책 없다 보면, 오히려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걸까?
일에 대한 아쉬움과 먹고사는 것에 대한 걱정은 잠시였고, 지금은 그저 머리를 쥐어뜯던 정신적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었다는 행복만 남아있다. 개운하고, 개운하고, 또 개운하다.
전 연애에서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새 연애를 하면 틀림없이 파국에 이르듯, 지금까지 난 전 직장에서 받은 상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채 무작정 다시 사회에 뛰어들었다. 이 꼴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안 그래도 기승을 부리던 회사 알러지는 이제 심한 염증이 되어버려 그쪽은 쳐다보기도 싫게 만들었다. 본인이 필요할 땐 꼭 함께하고 싶다며 온갖 감언이설로 공감과 지지를 건네던 이들이, 떠날 때는 꼭 밑바닥을 보여주고야 마는 행태에도 이젠 질려버렸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종종 이솝우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생각났다. 이 이야기의 내용과 교훈은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가만히 두었다면 하루에 하나씩 황금알을 낳아주었을 거위의 배를 기어코 갈라버린 농부의 어리석음은 코 앞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인간의 탐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언제부터 유래된 것인지도 모를 만큼 오래된 이야기임에도 현대까지 이어져올 수 있던 건, 그만큼 현실을 잘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내가 겪은 조직의 대부분은 농부와 같은 실수를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배를 가르려 했던 농부의 손아귀를 벗어난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후련하고 행복하다.
그리고 이제는 농부가 아닌 나를 위한 황금알을 낳아보려고 한다.
야생에서의 홀로서기를 시작한 거위는 살아남기 위한 현실적인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농장의 따뜻한 보금자리와 끼니때마다 주어지는 식사는 이제 없다. 자연을 헤치며 어떻게든 안전하게 잠잘 곳을 마련해야 하고, 먹이 역시 사냥을 통해 스스로 구해야 한다.
하지만 호시탐탐 목숨을 노리는 농부의 재촉 없이 매일 낳는 황금알을 오롯이 자신을 위해 쓸 수 있게 된 걸로 충분하다.
파격적인 결정에도 불구하고 참 다행히 주변의 많은 격려를 받았다. 오늘따라 유독 맑은 날씨도 날 응원해주는 것 같다.
자, 그럼 이제 앞으로를 위한 대책을 마련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