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줄 이미지로 보는 마음

광대하고 유연하고 끊임 없이 변화하는 네트워크가 마음의 본질

by 황인석

우리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일단, 마음의 정의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자. 마음은 우리 내부에 있는 것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생각과 느낌 등 여러 가지 정신적 활동이 일어나는 장소가 마음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러한 정신적 활동들을 일으키는 주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리적 신체를 별개의 실체로 구분했다. 데카르트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의 몸은 물리적 실체이고 정신은 그 안에 깃들어 있는 별개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이다. 영혼이라고 칭해도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몸이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고 남는다는 관념이 자연스럽게 뒤따르는데, 물론 이런 생각은 인류 역사 상 오래된 것으로 데카르트에 새삼스럽게 빚진 것이 아니다. 조상의 혼을 모시는 제사나 영혼의 부활을 가르치는 기독교의 교리가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다수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으며, 혹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영혼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뇌과학을 비롯한 생물학에서는 호흡과 혈액 순환의 원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신 활동에도 물리적 원인이 존재한다고 전제한다. 신경세포를 따라 흐르는 전기흐름이 곧 정신이다. 우리의 의지, 기억, 상상, 감정 등 온갖 정신적 활동을 신경 세포 단위에서 기술하고 설명하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지만, 전구에서 나는 빛과 모터의 운동이 전선을 흐르는 전기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듯 우리의 정신활동은 호르몬을 비롯한 신체적 요인들과 복잡한 상호작용을 주고 받는 신경세포 간 전기흐름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우리가 바라보는 모니터에서 일어나는 다채로운 현상들이 컴퓨터 내의 회로를 돌아다니는 전기흐름의 결과인 것과도 비슷하다.

그렇지만 컴퓨터나 전구의 비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비유들은 우리 마음의 한 측면을 설명하고 있긴 하지만 다른 많은 측면들을 표현하지 못한다. 비유라고 하는 것이 원래 서로 같지 않은 것의 공통된 일부를 뽑아내는 일이긴 하지만, 우리 마음의 좀더 다양한 다른 측면들을 함께 표현해줄 수 있는 비유가 있을지 찾아 볼 수 있다.

나는 거미줄의 비유를 제안해 보고자 한다. 머신러닝의 기반이 되는 인공신경망도, 우리의 뇌를 이루는 신경세포들의 연결도 네트워크이고, 네트워크의 어원은 그물이다. 고기를 잡거나 배구공이 걸리게 하는 그물도 네트워크의 한 사례가 될 수 있지만, 이런 그물들은 단단한 끈들이 묶여 그 고정된 형태를 유지하는 반면 신경망은 그 연결과 구성이 계속 바뀐다. 거미줄은 그 부드럽고 유연한 속성이 신경망에 대한 비유로서 더 적합하다. 물론 거미줄 역시 한번 지어진 다음에 형태가 바뀌지도 않고 그 패턴이 다양한 것도 아니지만, 그 부드러운 속성은 유연함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거미가 실을 자아 끊임 없이 확장하고 그 구성을 바꾸기도 하는 가상의 거미줄을 상상해 본다면 그 상상의 거미줄이 많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마치 허공에 쳐진 거미줄에 날아다니는 곤충이나 다른 물건들이 걸리듯, 마음의 거미줄엔 경험들이 걸린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거미줄 전체에 떨림이 일어난다. 작은 물건이 걸렸을 때는 큰 흔들림 없이 잦아들지만, 큰 충격이 있을 때는 파장의 범위가 확산되고 거미줄의 일부가 끊어지거나 구성이 달라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갖고 있는 신념에 반하는 새로운 정보나 지식이 부딪혀 오면 기존의 연결이 끊어지고 우리의 믿음 체계는 흔들리거나 무너지기도 한다. 또는 큰 상처를 주는 경험이 비슷한 역할을 하면서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다. 그런 경우 거미는 새로운 연결들을 만들어 기존의 패턴을 보수하거나 새로운 패턴을 짜내 빈틈을 메꾼다. 또는 새로운 소재들을 얻어 거미줄을 확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연결은 완전할 수 없고 부분 부분 끊어진 틈과 구멍들이 존재한다.

즉 마음의 거미줄은 우리의 경험을 받아들이면서 끊임없는 진동을 일으킨다. 동시에 그 경험들은 거미줄의 범위와 구성을 끊임없이 바꾼다. 확장하고 무너뜨리고 복구한다.

우리가 평소 갖는 믿음들, 유전자에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가 발현되는 선천적 지식들, 배우고 익힌 지식과 직관들, 습관들, 기억들이 함께 그 거미줄을 구성하고, 거미줄은 경험에 대한 우리의 모든 반응을 결정하는 기반인 동시에 경험에 의해 끊임 없는 변화를 겪는다. 외부적 사건들 뿐 아니라 우리가 하는 생각 한 조각, 감정 하나가 거미줄의 재료가 되고 패턴의 변화에 기여한다. 경험이 일으키는 떨림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구조적 변화의 연속, 그것이 우리의 마음이고 삶이다.

이 거미줄은 광대하고 복잡하여 우리는 그 전모를 다 알 수가 없고 주인으로서 온전히 기획하거나 통제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는 것이 다행이 아닐까?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마지막 문단에서 주인공 싱클레어는 이렇게 말한다. “그 후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이따금 열쇠를 찾아 나 자신 속으로 내려가면, 어두운 거울 속에서 운명의 영상들이 졸고 있는 그곳으로 내려가면, 나는 그저 그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나 자신의 모습을 본다…”

무척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는 소설의 다른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이 대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무슨 뜻일까 궁금해 했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자기의 내면에 들어가 자신의 모습을 보는 일이 고통을 이기는 위안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이제 이 문장의 참 뜻과는 별개로, 우리 내부에 있는 거대한 거미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 광대한 거미줄을 들여다 보는 일의 위안을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한다. 광대한 우주에 못지 않은, 1000억개의 뇌세포와 100조개의 연결부위를 갖는 네트워크가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직관은 이 광대한 네트워크의 전체적 결론이다. 논리는 직관을 구성하는 한 요소일 뿐, 결국 우리를 이끌고 나아가는 것은 이와 같은 직관이다. 그리고 그 직관에 스스로를 맡기는 것이 자유이다.

우리의 감각, 생각, 감정을 비롯한 모든 내적/외적 경험은 이 네트워크에 파장을 일으키고 그 구성을 바꾼다. 이런 변화를 이해하고 통제하는 우리의 역량은 형편 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우리의 노력과 시도들은 영향력을 갖는다. 잠깐 동안 품는 생각, 판단의 방향을 바꾸기로 한 작은 결심, 다시 한 번 마음에 떠올려 보는 기억 한 조각, 작은 살펴봄, 작은 실천 하나하나가 우리가 가진 네트워크를 변화시킨다. 그 하나하나가 어떤 방식으로 어떤 결과를 나을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한 번에 하나씩 우리가 믿는 의미들을 위해 마음을 쓴다.

그렇게 우리의 거미줄에 실 하나를 잇고, 실 하나를 끊고, 재료 하나를 보태는 일이 우리 삶 동안 계속 되는 수양이지 않을까 한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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