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는 서로 더해지지도, 쌓여지지도 않는다.
벤덤의 공리주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간명한 문구로 요약될 수 있다.
이 문구는 우선 사회적 윤리의 기준이다. 공공의 선택이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 하는가를 논할 때 합의의 기준으로 활용하기 쉽고, 실제로도 우리 사회 공공 정책의 기반 역할을 한다. 벤덤의 명제들에서 어느 정도 조정은 거쳐야 하겠지만, 대표적으로 공공 사업의 실행 여부 판단 및 우선순위 선정에 활용되는 비용 편익 분석은 공리주의에서 파생되는 전제들의 기반 위에서 행해진다. 즉, 여러 명의 사람이 함께 모여 무언가를 결정할 때 무엇을 지향해야 할까? 도서관을 지어 문화 수준을 높이는 것과 도로 건설을 통해 교통 시간을 단축하는 것 중에 무엇이 우선적인 가치일까? 비용 편익 분석은 어떤 가치가 다른 가치보다 우선한다고 전제하지 않는다. 대신 각각을 돈으로 환산해 그 크기를 비교한다. 이처럼 제반 가치를 더하고 뺄 수 있도록 돈으로 환산하여 통합한 결과가 곧 편익과 비용의 차이이고,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은 이와 같은 금액의 형태로 객관적으로 산출된다.
비용 편익 분석의 전제는 ‘사람들이 A보다 B를 선택한다면, A의 가치가 B보다 더 높다’는 것이다. 가격 메커니즘은 이와 같은 다양한 사람들의 가치 선호를 돈이라는 하나의 가치로 통합되도록 만들어 준다.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이 가치있는 것이고 사람들은 가치있는 것을 선택한다고 하는 동어반복적인 논리의 순환이지만, 시장은 각자의 사람들이 표현하는 가치에 대한 믿음들을 통합하여 재화의 가격으로 통합함으로써 객관적인 수치로 표현되도록 만든다.
하지만, 벤덤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사람들이 각자 주관적인 가치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동어반복적 전제를 넘어서, 사람에게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벤덤에 따르면 그 가치란 쾌락이다. 그 근거는 사람이란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쾌락의 기회를 버리고 절제하고 인내하는 것은 더 큰 쾌락을 위한 것일 뿐 그 자체의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타인의 쾌락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각자가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면 사회에 많은 문제가 생기므로, 그것을 규제하기 위한 법과 윤리가 존재할 뿐이다.
벤덤은 쾌락의 강도, 지속성, 확실성 같은 기준에 따라 쾌락의 가치를 수치화하는 것까지 시도했다. 적어도 그런 수식들은 공리주의의 정신을 보여주는 모델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배부른 돼지보다 낫다’라는 말로 유명한 벤덤의 후계자 존 스튜어트 밀은 숫자로 획일화된 쾌락 계산법에 쾌락의 유형에 따른 질적 차이를 반영하고자 했다. 밀에 따르면 정신적 즐거움이 육체적 즐거움보다 가치 있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통해 얻는 즐거움이 더 가치있다. 이런 시도는 거칠어 보이는 벤덤의 공리주의를 부드럽게 만드는 효과는 있겠지만 어정쩡한 타협처럼 보이면서 여러 의문을 갖게 한다. 정신적 쾌락과 물질적 쾌락이 그처럼 명확하게 구분이 되는 것일까? 전자가 후자보다 더 우월하다는 근거가 무엇일까? 책을 읽는 즐거움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 사이에 가중치를 부여한다면 2:1 정도일까, 5:1 정도일까?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먹는 즐거움 속에서 물질적 쾌락과 정신적 쾌락이 갖는 비율은 얼마일까?
공리주의는 가치의 가장 높은 장소에 ‘쾌락’을 두고, 그 쾌락에 얼마나 기여하는가로 나머지 모든 것들을 평가한다. 쾌락을 위해 행복한 가정을 가져야 하고, 행복한 가정을 갖기 위해 좋은 상대를 만나 결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좋은 대학에 입학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지금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지금 하고 싶은 일들을 참아야 한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얻는 즐거움을 그 시간에 공부를 했을 때 이후 평생에 걸친 즐거움이 늘어나는 정도와 비교해야 한다. 그러한 비교를 현실적으로 하기 어렵다는 것은 물리학의 공식에 따라 계산을 하면서 골프를 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직관과 어리짐작으로 계산을 대신해 공을 치는 것일 뿐 공을 치는 힘의 강도와 방향, 공의 무게와 회전력, 바람의 세기 등의 요소들이 어울려 공의 궤도를 결정짓는 물리학의 법칙은 현실로서 존중받는다. 우리는 어리짐작을 동원하지만 그 어리짐작의 판단과 선택들이 지향해야 하는 가치기준은 쾌락의 양을 최대화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공리주의가 전제하는 인간의 법칙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공리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계산의 어려움을 근거로 삼는 것으로 부족하다. 계산의 어려움은 법칙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쾌락의 양을 최대화하는 것이 선이라고 하는 전제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공리주의의 신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현실적인 이유로 의사결정에 쾌락의 양 대신 다른 기준들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것은 쾌락의 양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가치관 틀 내에서의 타협일 뿐이다.
공리주의의 문제점은 쾌락이라고 하는 가치가 저급하다는 것에 있지 않다. ‘쾌락’이라고 하는 단어에서 부정적인 뉘앙스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그것은 쾌락의 단어를 자신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특정한 쾌락과 연관시키기 때문이다. 음주나 흡연, 성적 즐거움 뿐 아니라 지적 즐거움, 타인을 돕는 즐거움, 창조의 즐거움, 성취의 즐거움, 사랑과 우정의 즐거움, 숲속을 한가롭게 거니는 소박한 즐거움 등 스스로 긍정하는 모든 종류의 즐거움이 쾌락에 포함된다.
벤덤의 쾌락 계산법이나 밀의 정신적 쾌락에 대한 우선순위 부여는 공리주의에서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다. 공리주의의 핵심적인 주장은 가치라고 하는 것이 서로 비교되고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양적인 실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양을 최대화해야 한다는 윤리 규칙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은 이 핵심적인 전제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인간이 쾌락을 지향하는 본성을 지녔기 때문에 쾌락을 최대화해야 한다는 전제는 합당한 것일까?
우리는 즐거운 경험을 할 기회가 생기면 부작용이 없는 한 그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본성을 지녔다는 것에서 우리가 즐거운 경험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무가 논리적으로 도출되지는 않는다.
물론, 일시적 즐거움을 위해 건강을 망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수 있다. 더 큰 즐거움을 위해, 또는 미래의 큰 고통을 피하기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경우와 같이 우리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양을 측정하고 비교하며 판단을 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들이 있다고 하는 것과 온전히 그러한 쾌락의 최대화, 고통의 최소화를 최고의 가치로 삼아야 한다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논리의 비약이 있다.
인간은 쾌락을 지향하는 본성을 지녔겠지만, 쾌락을 최대화하는 본성을 지니지는 않았다. 쾌락의 최대화라는 가치는 사고를 통해 나온 개념일 뿐이다. 그런 개념을 갖지 않은 인간은 쾌락을 최대화하겠다는 마음 없이 자연스럽게 이끌리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할 뿐이다. 하나의 쾌락에 마음을 쏟는 동안 다른 쾌락을 상상하며 그 양을 서로 비교해 보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더군다나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쾌락 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어떤 일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 일을 하고, 어떨 때는 양심의 불편함이나 귀찮음 때문에 쾌락을 포기하기도 한다. 편안함 역시 쾌락의 일종이기 때문에 편안함의 쾌락과 귀찮음을 무릅쓰고 얻을 수 있는 쾌락을 비교해서 더 많은 쾌락을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 역시 옳은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하나의 믿음이지 객관적 진실이 아니다.
인간의 운명은 같은 결말을 갖는다. 즉 누구나 다 죽는다. 죽음 앞에서 자신의 일평생 동안 얼마나 많은 쾌락을 누렸는지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람들은 이런 의문에 대해 궁극적인 의미가 없다고 대답하면 곧 허무주의가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허무주의가 되는 대로 살라는 결론으로 이끄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삶에는 그래도 추구할 의미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런데 쾌락(앞에서 이야기했듯 모든 긍정적인 경험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의 쾌락) 외에 다른 의미가 무엇이 있을까? 쾌락과 무관한 의미나 가치는 종교나 문화에 의해 주입된 독단이 아닐까? 그렇다면 쾌락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가치이고, 다른 가치들은 쾌락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하위 가치들일 것이다. 그렇게 믿지 않는다면 되는 대로 사는 허무주의나 근거 없는 독단적 믿음 밖에는 대안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런 식의 결론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런 사고가 성급한 비약을 포함한 오류라고 생각한다. 허무주의와 공리주의는 양 극단이고 그 안에는 넓은 의미의 공간이 있다. 의미는 부족하지 않다. 다만 그 의미들을 통합한 ‘계산 가능한 쾌락’이라고 하는 추상적인 가치의 존재를 믿으면서 그 가치에 스스로를 종속시키려는 지나친 성실함과 고지식함이 오히려 궁극적인 의미에 대한 의문으로 이끄는 것이다.
의미는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은 한 번에 하나씩의 의미밖에 담지 못한다. 우리의 본성은 지금의 우리 마음에 존재하는 그 의미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 의미들은 구체적으로 매 시간 현존하는 것이지만, 한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고, 그 사라지는 것들은 모을 수도 없고 서로 비교할 수도 없다.
세상에 객관적인 흔적을 남기는 목표의 성취가 의미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인 성취의 목표도, 순간 마음을 채우는 감정도, 자신과 한 약속도, 누군가의 간절한 요청도, 무엇이 옳고 무엇이 옳지 않다고 하는 판단도 의미가 될 수 있다.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직관,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을 채우며 무엇을 해야 한다고 알려주는 그것이 의미이다. 우리가 선택하고 행동하는 데에는 그 의미면 충분하다.
우리는 지금의 우리 안에 존재하는 그때 그때의 의미에 충실해야 한다. 그 의미들이 다른 의미와 비교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를 의미에서 멀어지게 한다. 의미들을 서로 비교하면서 가치를 매기고 계산을 하는 동안 우리는 의미를 경험할 수 없다.
서로 다른 의미들 간에 갈등을 겪고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삶에서 없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런 갈등은 우리 삶에서 예외적인 부분들로 여겨야 한다. 우리의 대체적인 삶은 의구심에 방해 받지 않는 그 순간의 의미들을 따라 흐르도록 해야 한다. 의미가 쌓여 이루는 무언가의 총합을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미를 따르는 흐름 속에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그 가치를 알고 있는 의미들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매 순간 마음 안에 있는 의미만 경험할 뿐 다른 의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의 의미에서 다른 의미로 옮기면서, 끊임없이 의미를 다시 경험하고 새롭게 발견한다. 그러한 흐름을 방해하는 고정된 강박들을 벗어나 매 순간 의미를 재창조하는 것, 그것은 자유를 정의하는 한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부연) 들뢰즈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원전을 읽어보려는 몇 번의 시도는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얼마 전 들뢰즈의 사상을 간단히 소개하는 글에서 트리(수목, 위계화된 가치 질서)와 리좀(하나로 환원되지 않지만 서로 연결되는 다중적인 흐름)의 대비가 중요한 대목임을 알게 되었다. 공리주의가 트리적 사고의 대표적 유형이고, 그것을 벗어나려는 시도가 리좀의 한 방식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이런 생각들이 위 글에도 영감이 되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