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억 속에서 걸어 나오니

by 조수란

이른 아침, 엄마는 집안 곳곳을 뒤집으시면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살짝 짜증이 난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거실에 나와 무얼 찾느냐고 물었다. 절대 말하면 안 되는 무슨 비밀이라도 생겼다는 표정을 지으시며, 엄마는 혹시라도 침실에서 휴대폰을 보고 있는 사위가 들을 가봐 내 귀에 가만히 속삭였다.


어제 자기 전 아래, 위 틀니를 어디에 놓았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사위한테 들키기라도 할 가봐 아이들까지 총동원시켜 집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다. 이때 신문 밑을 찾고 있던 작은 아이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놀란 식구들이 달려와 보니 그 곳에 틀니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작은 딸이, 불그스름한 잇몸이 달린 하얀 틀니를 보자 기겁을 했던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남편이 깜짝 놀라 침실에서 허겁지겁 달려 나오는 탓에 우리의 비밀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닌 세상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민망해진 엄마가 놀란 아이를 안아주시면서


“아이쿠, 이를 어째, 다 할머니 탓이다. 내 새끼 많이 놀랐지? 미안해~”


라고 하시면서 토닥여주었다. 그러자 내가


“엄마, 귀에 거신 귀걸이 빼고, 대신 양쪽에 틀니를 걸고 다니시면 안 될까? 아니면 목걸이라도 괜찮고요. 그렇게 되면 맹세컨대 절대 잃어버릴 일이 없을 걸.”


큰애는 배꼽잡고 쓰러지게 웃고 작은 아이는 할머니의 양쪽 귀를 번갈아 올려다보았다. 혹시라도 그 말을 사위가 듣기라도 하였을 가봐 엄마는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내 등을 세게 내리쳤다.


예전에 아는 선배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 선배가 여행 가이드를 할 때 일이다. 여러 관광객을 모시고 호텔에서 출발하기 전 손님들이 중요한 물건이나 소지품들을 잘 챙기셨는지


“다시 한 번 확인 부탁드립니다.”


라고 말했단다. 왜냐하면 먼 곳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다른 여행지를 이동해야했기 때문이다. 만발의 준비가 끝나고, 드디어 비행기가 출발했다고 한다.


이튿날, 가이드 앞으로 전화 한통이 걸려왔는데 전날 묵었던 호텔번호였다고 했다. 불길한 예감으로 전화를 받은 선배는 온몸으로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고 했다. 글쎄 호텔방에 있는 물 컵에서 손님이 전날 두고 간 틀니를 발견했다고 한다. 웨이터가 웬만하면 쓰레기인 줄 알고 버렸을 텐데 요즘 틀니 값이 워낙 비싸기도 하고 틀니주인의 입안이 허전해할 것을 생각하니 바로 가서 담당자한테 알렸다고 했다. 난감해진 선배는 관광 손님을 남겨두고 혼자서 비행기를 탈 상황도 아니고 자꾸만 이동하는 코스 때문에 정한 곳이 없고 하니 틀니주인에게 여쭈어보았다고 한다.


다행인 건 자주 잃어버리는 틀니 때문에 할아버지는 비상용틀니를 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할아버지는 똑같게 생긴 틀니 때문에 잃어버린 걸 전혀 모르고 계셨다고 한다. 가이드의 말을 듣자 당황한 할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국제택배로 집에 보내달라고 부탁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집주소를 받아 적으면서 선배는 난감한 상황에 웃음을 참느라고 혼났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틀니를 국제택배로 보내면 한국에 도착하는 시간까지 약 7일 정도 걸린다고 하니, 그 안에 한국에 먼저 도착할 예정이신 할아버지는 상관없다고 안심을 하셨다고 했다.


며칠 후, 여행사를 통해 난리가 난 상황이 벌어졌다고 하였다. 일주일후에 도착한다는 택배가 글쎄 3일 만에 집으로 배송되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보다 먼저 도착했을 터였다. 가족들은 택배를 뜯자마자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여행을 가신 할아버지가 사망, 실종되어 유품을 남겨주신 걸로 착각하고.


철렁하고 무너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할아버지 가족들은 해당 여행사에 전화를 걸었다. 여행사는 이 난감한 상황을 어찌어찌해서 겨우 해석하고 전화기를 통해 할아버지의 목소리까지 직접 확인 시켜드리고 놀란 마음을 가라앉혀주었다고 했다. 그때까지 할아버지는 택배가 그렇게 빨리 도착할 줄 예상하지 못했으며 국제전화 요금 때문에 전화기를 꺼놓으셨던 모양이다. 어쨌든 여행은 무사히 마쳤지만 그때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상황이 선배 인생의 한 페이지에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서도 기억을 자주 잃어버리는 습관이 있다. 엄마는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시면서 휴대폰을 찾는가 하면 머리에 꽂아놓은 빗 찾으러 화장대 위를 이리저리 찾아 헤매기도 한다. 물건을 잃어버리실 때마다 무슨 실종신고를 하시듯이 나만 찾는다. 때론 밖에 있는 나와 통화하는 중에 휴대폰을 잃어버렸다고 하신다.


혹시나 집안에 있는지 전화로 울려보라고 할 때면 내가, 지금 통화중이라서 끊고 다시 치겠다고 한다.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린 엄마는 배꼽을 잡으며 웃으신다. 휴대폰으로 통화하면서 휴대폰을 찾는 일이 우리 집에서는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엄마는 스스로 머리에 꽂아놓은 빗을 못 봤냐고 물어보실 때도 나는 먼저 거울을 보라고 한다. 그럴 때마다 진지한 내 표정에 뭔가 수상한 기분을 느낀 엄마는 그제야 거울안의 자신을 들여다보고 하하하 웃으신다. 왜냐하면 파마머리에 커다란 빗이 꽂혀있기 때문이다.


현관문 비밀잠금장치가 안 되어있는 집에 살 때는 집을 나설 때나 들어올 때나 열쇠가 항상 문에 꽂혀 있었다. 꼭 마치


“도둑님, 여기 비밀의 문에 정답이 꽂혀있으니 어서 들어와 원하시는 걸 마음껏 가져가시오.”라고 하는 것처럼.


나도 기억이 부실한 탓에 집 문을 나서서 3층에서 바깥의 1층까지 터벅터벅 걸어 내려온다. 그 다음에야 전기장판을 껐는지, 도시가스를 잠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면서 하루 종일 불안할 것 같은 마음에 다시 3층으로 올라가 확인할 때가 여러 번이다. 매번 집 나서기 전 재차 확인하는 습관을 들이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역시 기억은 내편이 아니었다.


나는 가끔 힘들거나 스트레스 받을 때 모든 기억을 다 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가 많다. 그 동안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면서 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가끔씩은 나도 몰래 생각나는 기억에 얹혀살기도 하고 슬픈 기억이나 그리운 기억이 떠오르면 감정컨트롤이 잘 안 되여 주체 없이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 지나간 세월 속에서 불쌍하게 자라온 내 자신을 생각하고 마음이 저려왔기 때문이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이미 지나갔기에 지금 생각하면 오래된 기억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다행인건 지나간 삶을 돌이킬 수 없고 고칠 수가 없지만, 지금부터 상황을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가끔씩 나를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만든다.


우리의 뇌는 용량이 부족하여 모든 삶을 기억하고 기억해 낼 수 없다. 만약에 정말, 화나고 생각하기 싫은 기억의 감정과 경험들을 가끔은 긍정적인 감정과 연결시켜보아도 좋은 방법인 것 같다. 그러한 과거의 안 좋은 환경이 오히려 오늘 더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나를 만들어줌에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기억하면 때론 아픈 기억이 오늘의 나를 더 성장하게 만들어주고, 외로웠던 기억이 두 아이와 함께 더 가까이 하게 하고 있으며, 가난했던 기억들이 돈을 감사하게 쓰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힘들게 살아왔던 기억들이 현재의 삶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게 만들 때도 있다. 그리고 죽음을 경험했던 끔찍한 기억들이 1분1초라는 시간을 아끼는 방법을 가르쳐주었고 매 순간 낭비하지 않는 삶을 살게 해주었다. 이 외에도 많고도 많지만, 지나간 기억속의 경험과 상처들이 오늘의 매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성장하는 내면을 만들어 주고 내일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게 할지도 모른다.


생각을 바꾸면 지나간 경험과 생각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과거가 되고 행복한 기억으로 쌓여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처럼 오랜 상자 속에 들어있는 기억을 꺼내는 일도 내 마음먹기에 달려있지 않을까 한다. 기억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기억장치에 걸려있던 프로그램도 시간이 오래되면 서서히 녹이 쓰는 것처럼, 기억도 희미해지는 건 마찬가지이다. 지금의 나야말로 온전하고 완전한 내 자신이다. 많은 기억은 나를 웃게도 울게도 만들지만 기억 속에서 걸어 나오는 순간, 또 다른 현실이 나를 마주 하고 있는 것처럼.


기억은 어쩌면 나에겐 지나간 추억이 환영일 뿐이고 그저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해내는 환상의 것들이며 그 순서나 절차는 정확하지 않거나 어떤 기억은 다르게 변질되었을 수도 있다. 기억 속에서 걸어 나와 내가 존재하는 현재만이 살아 숨 쉬고 살아 움직이는 이 순간의 진정한 나이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현재이고 나의 정체성이다.

기억 속에서 걸어 나와 현실을 마주하고 나를 선택하여 또 다른 미래를 바꾸는 내 자신을 만나는 것이 오늘의 나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미래를 바꾸는 오늘 지금 이 순간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