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복제된 삶

by 조수란

이 책을 쓰기 위해, 나는 먼지가 가득 쌓인 오래되고 낡은 기억상자를 조심스레 열어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 본다.


내가 어릴 때, 새벽 동이 트기 전이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김없이 큰 소리로 싸우셨다. 이유는 늘 술과 돈이었다. 높은 언성이 오가는 소리에 이어, 집 안의 그릇들이 공중으로 날아다니고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질 때면, 나의 심장도 함께 쪼그라들었다.

아침마다 반복되는 전쟁 같은 풍경 속에서 눈을 뜨는 일상.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은 하지 않고 돈만 쓰고 술을 마셔 농사일이 밀렸다고 한탄하셨고, 아버지는 그런 잔소리에 못 이겨 “웬수 같은 돈”이라며 주머니 속 돈을 탈탈 털어 불아궁이에 던져 태워버리셨다.

시뻘건 불길이 입을 벌리며 종잇돈을 순식간에 삼켜버릴 때, 나는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울고 싶어졌다. 평소에는 아이스크림 하나조차 아껴 사주시던 부모님이, 홧김에 아이스크림 수백 개를 살 수 있는 돈을 한순간에 불태워버리는 모습은 어린 마음에 충격 그 자체였다.


어느 날, 어머니는 앞마당에서 일을 하시다가 아버지가 땅에 몰래 파묻어둔 술통을 우연히 발견하셨다. 마치 보물을 찾은 듯한 표정으로 술통을 꺼내 풀밭 위에 통쾌하게 쏟아버리셨다. 그 순간, 풀잎들은 술비를 맞고 비틀거리며 쓰러졌고, 어떤 풀은 뿌리째 뽑혀 나가며 도망치려다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어린 눈에는 마치 술에 취해 기절한 것처럼 보였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아버지는 집 안에 부술 그릇이 남아 있지 않자, 내 가장 소중한 친구였던 TV를 엎어버렸다. 뒤집힌 TV에서는 ‘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가로줄이 그어지며 마지막 신호를 남기고, 나의 유일한 소통 창구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20년 후, 나는 엄마와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어린 시절부터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자라온 나였다. 누구보다 그런 삶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왜 나는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여러 자료를 찾아보니, 답은 ‘무의식의 반복’에 있었다.

어릴 때부터 쌓인 외로움, 두려움,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습관이 되어 무의식에 깊이 각인되면, 어른이 되어서도 자존감이 낮아지고 스스로를 감정의 울타리에 가두게 된다는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부모님의 싸움 속에서 불안정한 감정 패턴이 형성되고, 그것이 무의식의 지배를 받아 다시 같은 모습과 고통으로 되풀이된다.


동국의대 정신건강의학과 사공정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게는 ‘반복강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프로이트가 말한 정신분석 용어로, 과거의 경험이 자신을 고통과 불행으로 이끌어도 그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뜻합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선택할 수 없는 삶에 노출되며, 그 속에서 익숙해진 세상을 무의식적으로 ‘편안함’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행복, 불행과 상관없이 익숙한 환경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게 되는 것이죠.”


아이의 뇌에는 아버지의 모습이 남성상으로 깊이 새겨진다. 평소엔 무의식에 숨어 있다가도 불쑥 튀어나와 어머니와 같은 삶을 선택하게 만든다. 이것이 반복강박의 무서운 힘이다.


우리의 뇌는 익숙함과 편안함을 본능적으로 좋아한다.

만약 술을 멀리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면 낯설고 불편하게 느끼지만, 술을 즐기고 익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을 만나면 오히려 안도감과 친근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내가 어머니와 같은 삶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해온 이유였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가난의 대물림’이었다.

그 시절 우리 집은 가난을 넘어 궁핍했다. 텅 빈 살림, 깨진 가마솥뚜껑, 신문지로 도배한 천장, 유리 대신 종이를 붙인 창문... 전기요금을 내지 못할 때면 솜을 기름에 적셔 촛불처럼 밝혀야 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나는 ‘돈은 벌기 힘들다’, ‘삶은 고되고 버겁다’라는 인식을 자연스레 내면에 새겨왔다. 결혼 후에도 죽기 살기로 일했지만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쑥쑥 자라고, 나이와 주름은 해마다 공짜로 찾아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제는 변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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