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 연화한테서 연락이 왔다. 저번에 말한 오빠의 친구인 준형이 오빠가 군대 갔다 제대하고 오랜만에 연화네 집에 놀러온다고 하였다. 여자 둘, 남자 세 명이 왔는데 나까지 합류하면 짝이 딱 맞아 떨어진다고 하면서 내가 오길 간절히 바란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자 기분이 설레면서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까지 하였다. 혹시 모를 준형이 오빠라는 남자애가 그날 만난 그 남자아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들뜬 기분이 가라앉질 않았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남자의 앞에 나타나 견뎌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 마음과 달리 나는 연화의 요청을 거부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모르는 그 아이 앞에 나타날 용기가 전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며 혼란스러운 순간을 선택할 시간이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끝내는 가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고 계절도 바뀌었지만, 차마 연화한테 먼저 연락을 하지 못했다. 연화가 전화가 오는 날이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원 다니느라 시간이 없어서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혹시나 모를 그 남자아이와 부딪치기라도 할까봐 나도 몰래 매번 회피하고 있었다.
어느덧 8월의 무더운 여름이 되었다. 사람들에게 땡볕이 내리쬐는 대낮보다 따뜻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면서 더위를 가라앉히는 야시장이 인기를 끌었다. 흥겨운 노랫소리가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을 춤추게 해주면서 온 사방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나에게 밤거리가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할지라도 그때 겪은 끔찍한 백화점 사건 때문에 항상 경계심과 소심함과 두려움을 지니고 다녔다.
야시장은 내가 사는 곳에서 얼마 멀지 않기에 늦은 오후, 음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면 나는 가끔씩 맛있는 간식들을 사오고 시장구경을 하기도 한다.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바쁜 일과를 마치고 오랜만에 흥성거리는 시장에 가서 마음의 여유를 만끽하려고 노력하였다.
오랜만에 흥성거리는 시장에 예쁜 디자인의 옷이 새로 나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마침 냉장고 안이 텅 비어있기도 하였다. 오늘은 뭐 먹을까와 함께 뭘 입을까를 고민하면서, 긴 생머리를 곱게 풀어헤치고, 지난 생일 때 언니가 사준 예쁜 원피스를 입어보았다.
오늘따라 한껏 멋을 내어 소녀다운 아름다움을 되찾고 싶었고 따분한 기분을 업 시키기 위해서였다. 자유와 행복은 먼 곳이 아닌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알아차리면서 내가 선택하여야 했고 내 삶의 희망이 내게 있음을, 나는 알 것 같았다. 다만 그것을 발견하고 찾아가는 길은 내 자신한테 달려있음을.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것이 일상이 되고 그 사소한 일상이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가 삶이 되고 인생이 된다.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자그마한 노트와 필을 꺼내 머릿속에 떠다니는 문장을 옮겨 적었다.
지금은 비록 모든 것이 작고 부족하지만 그렇게 조금씩 한 발짝씩 용기 있게 앞으로 내디디면서, 순간을 살아가고 부딪치고 넘어진다. 그 과정에서 배우고 경험하고 조금씩 성장하는 삶을 살아가는 생각과 선택과 행동과 결정에 의해 모든 것이 차이가 난다.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집에서 나와 시장으로 발길을 옮기는 와중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떨쳐내지 못했다.
육체가 크고 영혼이 작은 사람, 영혼이 살찌고 육체가 건강하지 못한 사람,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마음과 정신과 육체가 어릴 때부터 건강하고 올바르게 자란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아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나 아픈 상처와 힘든 과거가 있었을 것이고 지워지지 않는 상처와 기억과 불행한 일이나 시련이 닥쳤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실패하고 실수하고 경험하고 부딪치면서 우리는 성장한다. 만약 어린 시절부터 열린 마음으로 행복한 가정에서 완벽하게 자랐더라도 부모의 지나친 과잉보호로 자라나면서 부모의 사랑과 집착이 오히려 독이 되고 인생을 망칠수도 있다.
때문에 이 세상에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숨은 사실이나 부족함 들로 얼룩져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수용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실패가 없고 실수가 없는 삶은 성공과 행복과 성장과 발전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고통과 아픔과 불행과 삶의 밑바닥이 발판이 되고 내 인생의 양염이 되어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유일하고 가장 소중한 내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여야만 한다. 사는 게 참 쉽지가 않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도전하고 노력하여 알차고 보람 있는 삶을 살기도 한다. 그렇게 행복을 알고 세상을 견디고 나면 인생이 즐거워지기도 하면서.
여기까지 생각하자 시장 한 바퀴 거의 지나갈 무렵에야 아무것도 사지 않고 텅 비어있는 양손을 발견하였다. 이때 길 맞은편 바로 옆에 아름다운 자태로 서있는 모델이 걸친 예쁜 옷이 눈에 띄었다. 나는 다짜고짜로 달려가 그 앞에 멈춰 서서 곱게 디자인하여 꾸민 옷을 살며시 만져보았다. 그리고는 옷값이 궁금해져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가격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가게 사장님에게 여쭈어보려고 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나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옷가게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때, 어디선가 지독한 술 냄새와 함께 누군가가 내 손목을 꽉 틀어잡았다.
“어이, 아가씨야 이 옷 내가 사줄게.”
꽉 조여 오는 손목 옆으로 문신을 한 팔이 먼저 눈에 띄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드는 순간 음흉한 눈빛으로, 짓는 웃음과 함께 들리는 거친 숨소리가 온 몸에 소름을 끼치면서 공포가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