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몇 년이란 세월이 지나 그 동안 일했던 곳을 그만두고 온전하고 완전한 나만의 자유와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그 후, 친구들에게 떠밀려 여러 번의 소개팅에 나갔지만 어릴 때부터 행복과 거리가 먼 가정에서 자라온 불행한 기억들이 겹치면서 악몽과 같은 현실이 반복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리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거절을 했고 혹시나 거절을 당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 동안 가까이에서 지내오던 몇몇 친구들은 하나 둘씩 자기 인생의 반쪽을 찾아 행복한 삶을 이어나갔다.
어느 날, 나는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취직을 하려고 신문을 찾았다.
정말, 이러다 내 인생이 영원히 시작만 하다가 마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하여서 답답한 마음에 연화에게 연락을 했다. 전화기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가 그 동안 마음한구석에 방치되었던 고독이 자리 잡은 서늘한 곳에 비집고 들어와 따뜻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30분 뒤에, 연화가 다니는 회사 근처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다. 때는 추운 겨울이라, 부랴부랴 감은 긴 생머리를 드라이기로 대충 말린 다음 집을 나섰다. 뼈 속까지 스며드는 추위는 발걸음을 더욱더 빠르게 재촉했다. 택시를 타면 금방 도착하지만 그 동안 힘들게 벌어온 돈을 아끼고 절약하면서 알차게 생활하는데 습관이 되자 시내버스를 이용하였다.
한적한 버스 안에는 사람이 몇 안 되었다. 하늘에 걸려있는 해님이 쏟아 낸 빛이, 창문을 통과해 텅 빈 의자위에 살며시 기댔다.
두 정거장을 지나, 어느새 카페근처에 도착했다. 매서운 바람이 눈보라를 일으켜 앞을 가로막고 세게 불어댔지만 우리사이의 소중한 만남을 막지는 못했다. 저 멀리 보이는, 아담한 카페 안에서 연화가 소파에 기대앉아 커피를 홀짝이면서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조급한 마음이 먼저 도착을 하고 몸이 추위를 견뎌내면서 그 뒤를 허둥지둥 쫓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상상한 그대로였다.
조용하고 포근한 카페 안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은 몸속의 불안한 세포와 차가워진 공기를 녹여주고 잠재워주었다. 연화와 나는 마치 오래전에 만난 사람처럼 서로를 반겨주며 팔짱을 끼고 햇볕이 잘 들어오는 창문을 향해 마주 앉았다.
뜨거운 커피가 나오자 두 손을 컵에 갖다 댔다. 따뜻한 온기가 온 몸에 퍼지면서 진한 행복을 안겨주었다. 따뜻함과 포근함이 섞여, 손바닥을 통해 온 몸으로 스며들었다. 커피향기가 코끝을 맴돌더니 머릿속을 편안하게 해준다.
해님은 항상 그랬듯이 받아들일 공간과 조그마한 틈새가 있으면 너그럽게 골고루 빛을 비추어주었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 잔에도, 미소가 깃든 입가에도, 살짝 벌어진 호주머니 속에도 우리의 비워진 마음에도 언제나 따뜻하게 빛을 비추고 포옹해주었다. 그리고 유유하게 들려오는 음악소리는 이 기분과, 이 환경과, 이 편안함과, 이 순간의 감정에 잘 어울렸다.
참으로 따뜻하고 행복하고 감사하는 순간이다.
연화는 커피를 몇 모금 홀짝이더니 TV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던 뉴스를 꺼냈다.
“기억나? 그때 금성백화점에서 일어난 묻지 마 살인사건 있잖아, 그 범인 사형에 처한대. 췌장암 말기인데다가 믿었던 여자 친구에게까지 배신을 당했으니 어차피 죽을 거 저렇게 다 같이 죽자고 저지른 짓이래.”
커피 잔에서 흘러나오는 하얀 김이 그날의 기억을 되살려주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저렇게까지 잔인할 수가 있지?”
나도 잔을 들어 한 모금 홀짝이면서 중얼거렸다.
순간 그날 있었던 끔찍한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두려움이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그날 있었던 일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기억하기조차 힘든 끔찍하고 처참한 장면들이 필름처럼 눈앞을 스쳐지나갈 때면 토 나올 듯이 어지럽고 현기증이 났다. 머릿속에서 잊혀 지지도 지워지지도 않는 생생한 장면과 기억들이 소름 돋는 비명소리와 함께 귀를 때리고 마음 한구석을 마구 쓰라리게 긁어놓았다.
연화가 흥미진진하게 하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날 웃기는 게 뭐냐면, 우리 오빠 대학교 때 친구 준형이 오빠도 백화점 현장에 있었대. 마음이 착하고 아주 잘생겼지. 혹시 너 내 친구 미주라고 알지?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
“어, 예전에 한 번, 너 생일에 초대했었잖아.”
“그래, 맞아. 미주가 글쎄 준형이 오빠한테 두 번이나 고백했다가 결국 두 번다 튕겼지 뭐야. 웃기지.”
“어? 어 ㅎㅎ.”
연화의 말을 들으면서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달콤하고 향기 가득한 커피를 홀짝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날 목숨 걸고 불구덩이 속에서 구해주었던 생명의 은인인 그 낯선 남자애를 떠올렸다. 연화는 잠시 동안 멍하니 깊은 생각에 잠긴 내 눈앞에 손을 흔들어대며 머릿속의 생각을 잡아당겼다.
갑자기 뭔가 생각나는 듯, 연화는 손가락 한번 튕기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테이블 위로 들이밀며 말했다.
“아, 맞다. 그날 그 오빠도 현장에 있었는데, 범인이 글쎄 준형이 오빠를 죽이려고 뒤에서 칼을 높이 쳐들고 찌를 찰나에 경찰이 때마침 머리에 총을 겨누고 체포를 했다는 거야. 그래서 간신히 살아남은 거래.”
연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말에 걸려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던 커피가 푹하고 사방에 뿜어져 나왔다. 고통스럽고 연속되는 기침에 깜짝 놀란 연화가 재빨리 달려와 등을 두드려주었다.
혹시 그 남자아이인 걸까? 그 남자아이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어쩌면 그 장면이 우리의 그날과도 너무나 닮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 동안 가끔씩 그 사람에 대한 의문과 궁금증들이 마음속에서 시위를 벌였다. 어릴 때부터, 누군가 나를 위해 목숨을 걸면서까지 구해준 사람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라는 호기심에서랄까?
하지만 그렇게 떠오를 때마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내 삶의 생각과 질문들을 무시하고 삼키고 통제하였다. 나 혼자 생각하고 나 혼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왜서일까?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고, 나는 나를 사랑할 줄 몰랐고, 나는 나를 용서하지 못했고, 나는 나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항상 부족함과 결핍으로 잘못된 생각과 판단이라고 결론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어릴 때부터의 만들어진 습관과 고집과 낮은 자존감이 나를 생각의 틀 속에 가둬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생각이 마음까지 통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탈의실에서 그 남자애랑 처음으로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뜨거운 순간들을 떠올리면 부끄러움이 온 몸을 익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혼자서 설레고 혼자서 가만히 느껴지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연화와 헤어진 뒤, 집으로 곧장 달려온 나는 어디선가 모르게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되는 순간이 다가오면서 이불을 거꾸로 뒤집어 쓴 채 그 속에 몸을 파묻었다. 처음 느껴보는 이 기분, 이 설렘은 뭘까? 혹시 내가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걸까? 나는 내 입술을 살며시 만져보았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이 감정은 가슴을 두근두근 설레게 해주고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날의 기억과 함께 공포가 밀려오면서 아찔했던 순간들로 기억이 머릿속을 찾아들면서 죽기 살기로 뛰었던 장면들이 떠올라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