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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May 13. 2022

(소설) 아담과 애플 21

"조르바호에 탑승하신 여러 분을 환영합니다. 저는 이 배의 선장 주성훈입니다. 세일링을 처음 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오늘 조르바호는 부산 수영만을 떠나서 내일 울릉도에 닿았다가 다시 독도를 향해 항해한 뒤 수영만으로 복귀하는 정입니다. 수영만에서 울릉도까지 약 17시간,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약 7시간이 소요되는 세일링으로 대략 오륙일이 걸릴 겁니다. 중간에 야간 항해는 두 번 정도 있을 예정이나, 요트 면허증이 없는 은정씨와 진아는 케빈 베드에서 안심하고 주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조르바호에는 선실이 두 개뿐이라서, 은정씨와 진아가 한 개의 케빈을 사용하셔야 됩니다. 조르바호는 최신 장비를 보유한 배이며, 우리 팀의 유능한 닥터이며 자발적 요리사인 찬우는 요트 경력 20년의 베테랑 요트인입니다. 작가 정환이는 무면허로 산과 바다를 이십오 년째 누비고 다니는 방랑객으로 살다가 올봄에 요트 면허증을 취득했지만, 찬우보다 서너 단계 레벨이 높은 편이죠. 친구들보다 경력도 짧고 레벨도 낮은 제가 조르바호의 선주라는 입장으로 선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오늘 유난히 한여름 날씨 버금가게 무더운 날이지만, 곧 출항하게 되면 바닷바람이 제법 시릴 겁니다."


선장 주성훈의 짧은 스피치가 끝나기가 무섭게, 김찬우가 권진아의 드러난 어깨 위로 그의 윈드재킷 하나를 걸쳐 주었다. 손정환은 조타석 뒤로 펼쳐진 휴게실 공간의 의자 위에 놓아두었던 구급약 상자에서 키미테를 꺼내 들어 여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의자 위에는 선상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데크 슈즈까지 여성들 발 사이즈에 맞추어 구비되어 있었다. 김찬우가 건넨 점퍼 속으로 팔을 집어넣고 있던 권진아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울릉도에 독도까지~ 니들 무슨 애국 결사단이니? 방송국 카메라는 없는 거야? 난 이런 건 줄 모르고 찬우 연락받고 와인만 세 병들고 따라나섰단 말이야.. 요트에서 선셋 바라보며 럭셔리하게 와인 마시고 즐기는 파티인 줄 알았는데, 이게 뭐니? 찬우가 겨울 방수 점퍼 운운할 때부터 눈치챘어야 하는 건데... 아, 몰라~ 은정씨는 알고 있었어요?"


권진아는 아이처럼 징징거리는 말투로 장사꾼에게 속아서 물건을 산 사람처럼 억울한 표정을 짓고는 있었지만, 은정은 그런 권진아의 모습이 밉거나 싫지가 않았다. 오히려 처음 보는 권진아가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여자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은정은 진아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서 아래층 선실로 그녀를 이끌며 내려갔다.


좁지 않은 거실의 왼편에는 베이지색톤의 안락한 소파가 누워있고 소파 앞에는 식탁으로도 사용 가능한 테이블과 널찍한 주방이 보였다. 마주 보이는 두 개의 선실 옆으로 화장실과 샤워 시설이 각각 분리된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선장 주성훈의 오더에 따라 은정과 진아가 하나의 선실을 나눠 쓰기 위해 진아가 케빈으로 들어가 옷과 수영복 등이 잔뜩 들어있는 짐가방을 정리하는 동안, 은정은 주방과 화장실 등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가방 안에서 점퍼 하나를 꺼내 입은 은정이 선상으로 올라왔을 때, 조르바호의 하얀색 돛이 올라가고 있었다. 조르바호가 계류장을 부드럽게 빠져나가고 있는 동안, 바다는 잔잔했고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렀다. 20프로의 엔진과 80프로의 바람으로 항해하는 세일링 요트의 낭만이 은정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바다 바람 속에서 진한 커피 향이 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김찬우가 은정의 옆으로 다가와 커피 한 잔을 건네주었다. 조타석에서 키에 손을 얹은 채로 바다를 응시하고 있던 성훈이 은정을 향해 말했다.


"오늘 세일링 하기에 정말 좋은 날씨네요. 바다가 유리처럼 잔잔해서 속도는 좀 느리지만, 멀미도 안 나고 커피 마시기에도 굿입니다~"


"성훈이 멘트 참 깔끔하구나~ 본투비 사업가야. 딱 필요한 말만 해요. 생긴 거하고는 다르게 참 매력이 드물어~ 남자가 어디 한 군데 달달한 구석이라도 있어야는데, 정환이한테도 있는 달달함이 성훈이한테는 쏙 빠져 있단 말이지."


성훈을 향한 김찬우의 짓궂은 익살에, 권진아가 주성훈에게 품은 울분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가세했다.


"찬우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지, 나는 성훈이가 지금도 이상하게 어렵더라~ 쟤는 틈을 안 줘. 은정씨는 성훈이가 안 어려워요? 성훈이가 게스트로 모셔온 분이라면서요. 나 찬우한테 그 소리 듣고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잖아. 주성훈이 여자를 모셔온다?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


그러자 아래층에서 커피를 한잔 더 리필해 올라온 손정환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인연은 그래서 따로 있는 겁니다. 똥 싸고 막힌 변기를 보여줄 수 있을 만큼 될 때 결혼이란 걸 해야 하는 거겠지. 야간 항해보다 위험한 항해가 바로 결혼 아니겠어?"


손정환의 뜬금없는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권진아가 벼락이라도 맞은 나무처럼 두 눈에서 빛을 번쩍이며 냉큼 소리쳤다.


"성훈이 결혼하니?"


권진아의 날카로운 외침에 은정이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 사이, 계기판을 바라보며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던 성훈의 평온한 표정을 읽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성훈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성훈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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