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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un 10. 2022

(소설) 아담과 애플 24

선착장에는 성훈의 일행을 격하게 맞이하는 한 남자가 이미 마중을 나와 있었다. 간밤에 조타석을 번갈아 지키고 서있던 세 남자와 새로운 정당 창립에 관한 이야기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두 여자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그의 뒤를 따랐다.


새까맣게 그을린 피부가 오히려 그의 얼굴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가 일행의 앞에 서서 여자들의 가방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가다가, 저만치에 세워 놓은 소형 버스의 문을 열고 짐들을 실어 옮겼다. 민박집을 운영한다는 남자가 손정환의 사촌 형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사이, 버스는 섬을 달린 지 십 분도 되지 않아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올려져 있는 하얀 집에 그들을 데려다 놓았다. 성훈과 일행들은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창을 가린 커튼 사이로 햇빛이 가느다랗게 새어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은정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정오가 넘은 시각이었다. 은정의 옆에 누워서 일정한 간격으로 얕은 숨소리를 내고 있는 권진아를 바라보는데,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평화로운 안도감 같은 것이 밀려왔다. 어머니가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뒤로 은정은 늘 혼자였다. 공간이 주는 침묵은 가끔 공포스럽게 느껴진 적도 있었다. 마치 우주의 영원한 침묵처럼 캄캄하고 끝이 없을 것만 같은 공포였다.


곤히 잠들어 있는 진아를 깨우지 않으려고 은정은 조심스럽게 방을 나왔다. 화장실에서 대충 세안을 마친 은정이 밖으로 나오자, 함께 배를 타고 온 남자 세 명과 집주인 남자가 바다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마당에서 불을 피우고 있었다. 마당에 세워 놓은 널찍한 테이블 위에는 김찬우가 조르바호에 실어 온 고기와 집주인이 바다에서 잡아 올린 온갖 해산물들로 가득했다.


"내일 새벽 일찍 배를 탈 거라서, 지금부터 본격적인 심포지엄을 시작해보려 합니다~"


한 손에 집게를 들고 있던 김찬우가 마이크 대신 집게를 입 쪽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집주인이 지핀 장작불 위로 커다란 석쇠가 라 가고 고기와 해산물들이 익어가는 냄새가 날 무렵에, 깔끔하게 단장을 한 권진아가 마당으로 합류했다.


"뇌과학과 생명공학에 따르자면,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종의 신화적 상상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단 말이지.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손정환의 사촌 형이 술잔을 들다 말고 퍼뜩 떠오른 생각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자네들~'이라는 호칭이 은정에게는 운율에 달라붙어 있는 시어처럼 들려왔다. 해산물들을 먹기 좋게 가위로 잘라 놓던 손짓을 멈추며 김찬우가 그의 말을 이어받았다.


"그러게 말이에요, 형님~ 과학이 발달할수록 인간이라는 존재가 미토콘드리아의 집합체 정도로 느껴지니, 가끔은 우리의 지식이 과연 유용한 것이기만 한 건가 회의가 들 때가 있어요."


세상이 온통 못마땅하다는 듯이, 김찬우가 집게와 가위를 내려놓고 술잔을 집어 들었다. 손정환이 김찬우의 술잔에 술을 부어주면서 말을 보탰다.


"호르몬과 유전자로 인간을 설명한다는 것은 인간 지성의 존재론적 지위를 강등시키는 행위가 아닐까 싶어. 이거야말로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구상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나?"


손정환의 의견을 듣고 있다가 은정도 평소의 생각을 덧붙였다.


"과학에서 제시하는 근거들이야말로 어떤 경우엔 더없이 무성의하고 빈약한 근거가 아닐 수 없지요.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건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신념'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거든요. 인간은 스스로 지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을 알아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과학적 지식에 의존해서 인간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인간의 자만심이 깔려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자 주성훈이 고개를 갸웃하며 은정의 말에 이의를 제기했다.


"유전자로 설명하는 과학은 오히려 인간도 다른 생명체와 별다를 거 없으니 겸손하라고 주장하는 거 아닌가요? 은정씨는 거기에 어떻게 인간의 자만심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하세요?"


"성훈씨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과학이 주는 정보로부터 겸손을 배우셨나 보네요. 같은 지점에서 인간의 자만심을 발견한 저는 오만함부터 배운 게 되네요. 흐흐흐~"


은정의 대꾸에 모두들 유쾌한 웃음을 지으며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술잔을 나누었다.


"예술가는 사랑을 욕망의 단계에서 바라보나, 아니면 신념과 의지의 영역에서 다루나? 진아는 사랑을 어느 영역에서 관찰하니?"


손정환이 권진아의 빈 술잔을 채우며 물었다.


"사랑의 영역이라~ 어느 영역에서 관찰하는 게 바람직한 건데? 신경물질의 전달에 따른 욕망의 영역도 사랑이고, 신념을 지키려는 의지의 영역에서도 사랑은 관찰되지. 그냥 마음이 원하는 대로 가는 게 사랑일 거야. 욕망도 마음이 불편하면 사그라들거든."


권진아가 주저함 없이 대답을 내어주고는 술잔을 높이 들어 올리며 "오직 사랑을 위하여~"라고 외치자, 모두들 술잔을 높이 들어 "오직 사랑을 위하여~"라고 함께 외쳤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먹고 마시고 사랑하는 것 밖에는 없다고, 그 순간 은정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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