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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May 30. 2022

(소설) 아담과 애플 23

짙은 묵색의 바다 위로 둥근달이 떠올랐다. 달빛 아래 검은 바다 위를 조르바호가 멈추지 않고 달렸다. 요트에서 함께 나누는 첫 저녁 식사를 마련해준 김찬우가 손정환의 뒤를 이어 조타수가 되었다. 권진아도 이은정도 쉽게 잠들 수 없는 밤이 선상에서 깊어갔다. 정당 설립에 관한 이야기는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중앙당 소재지가 서울 이어야 한다는 건, 구태한 정치권력을 여실히 드러낸다고 볼 수 있지. 수도권을 중심으로 하는 권력형 정치체제를 국민들이 계속해서 승인해주고 있는 꼴이 아니고 뭐겠어?"


밤이 깊어도 손정환의 예리한 눈빛과 청정한 음성은 달빛처럼 하얗게 번득였다. 작가라는 소임에 걸맞은 눈빛이라고 은정은 생각했다. 아버지 사고 이후로 국가와 정부라는 실체에 관하여 부정적인 시선마저 생겨난 지 오래지만,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은정은 국가와 정치에 관해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드러내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


"개인들은 '국가'라는 장치 속에서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규정되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잖아요. 네이션(nation)이 성립되기 이전에도 개인들은 존재했는데 말이죠. '민중'이나 '인민'이라는 이름도 있다는 걸 사람들이 대체로 잘 모르고 사는 거 같아요."


검은 바다 위에서 요트가 나아가며 파도를 가르는 소리에도 은정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려왔다. 은정의 발언에 손정환이 은정 앞으로 다가와 오른손을 내밀며 말했다.


"동지~ 왜 이제야 나타났소?"


정환의 과장된 리액션에 모두들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은정은 붉은 와인잔에 들어간 달빛의 기세를 몰아 한 마디 덧붙였다.


"육지 위에서 바라보던 달빛은 한없이 낭만적이고 신비롭게 느껴졌는데, 검은 바다 한가운데서 바라보는 달빛은 어딘가 차갑고 엄중한 느낌이 들어요. 냉혹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그러자 정환이 은정을 위로하듯이 따뜻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대형 여객선도 아니고 작은 세일링 요트를 타고 밤바다 위에 떠있어서 그럴 거예요.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세요. 위대한 자연의 갑작스러운 변화마저, 이제는 과학 기술로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 시대잖아요. 지금 우리는 교통사고의 위험보다도  더 안전하다고 보면 돼요. 곧 새벽이 밝아올 겁니다. 바다 한가운데서 맞이하는 여명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이지요."


성훈이 은정의 옆에서 가만히 어깨를 감싸 안았다. 모두들 성훈의 행동을 눈여겨보지 않았으나, 은정의 얼굴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성훈이 기성 정당에 가입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지?"


와인을 홀짝거리던 권진아가 느닷없이 질문을 던졌다. 은정도 그것이 궁금하던 차였다.


"기존 정당들의 이념과 활동이 21세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거 같아서. 지금의 한국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한 기성 정당들의 수고는 인정하지만, 이제 '민주화'의 역사성에서 벗어나 진정한 '정치'의 시대를 열어갈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야. 그 무엇에도 뿌리내리지 않고 오직 '현재의 민중'에 뿌리를 두는 정치, 누군가의 통치가 아니라 민중이 스스로 정치하는 사회, 그런 패러다임이 기성 정당에는 없는 거 같아서 말이야."


성훈이 한층 선명해진 수평선 위로 시선을 응시하며 또렷하게 대답했다. 손정환이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저기 울릉도가 보인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저 멀리 보이는 섬 하나를 일제히 바라보았다. 손정환이 다시 우렁찬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듯이 부르짖었다.


"민중의 섬에 노를 저어 가자.

 민의 섬에 닻을 내리자."


그러자 키를 잡고 있던 김찬우가 오른팔을 들어 올리며 함께 따라 외쳤다.


"민중의 섬에 노를 저어 가자.

 민의 섬에 닻을 내리자."


은정의 옆에 있던 권진아가 유쾌하게 웃으며, "얼쑤~" 한 마디를 짧게 내뱉고는 탈춤 동작 같은 몸짓으로 팔다리를 흔들며 선상에서 한 바퀴 턴을 돌았다. 조르바호가 울릉도에 닻을 내릴 즈음엔, 시푸른 바닷속에서 벌건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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