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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un 24. 2022

(소설) 아담과 애플 26

도당대회의 분위기는 여느 때보다 팽팽하고 무거웠다. 장민철 도당위원장의 독단과 전횡이 있었다는 일부 주장이 제기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가시화된 도당 내부의 분열은, 주민국을 새로운 위기로 몰아넣고자 하는 것 같았다. 장민철의 힘을 축소시키려는 것은 주민국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박태성은 잘 알고 있었다. 삼십 년 동안 생활 한복을 입고 지내는 태성을 세간에선 한 길만 파는 우직스러운 사내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박태성은 언제든지 또 다른 길을 염두에 두고 은근하게 모색하는 타입이라서 당내에서도 크게 적을 만들지 않았다. 내년에 치러질 지방선거에서 주민국은 박태성에게 비례대표 시의원 자리를 약속했었다.


박태성은 정치는 결국 인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십 년 전 태성이 프로필에 넣을 변변한 직장을 갖지 못하고 있었을 때, 주민국은 박태성에게 대외적으로는 그럴싸해 보이는 '청진 수련원장'이라는 직함도 주고 월급도 주는 자리를 제안해왔다. 그리고 박태성이 주민국을 따라 자연스럽게 보수당에 가입한 것이 벌써 십 년 전 일이다. 십 년 세월 동안 주민국에게 충성했으니, 시의원 정도는 당연히 박태성의 몫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던 참이다. 박태성은 당원들의 마음을 장민철에게로 다시 돌려놓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분주히 움직였다. 도당대회가 끝나고 장민철이 앞으로 남은 임기를 마칠 수 있게 되었다. 장민철이 도당위원장 자리에 있는 동안 박태성의 시의원 진출은 따 놓은 당상이 분명했다.


장민철의 자리 보존이 확실해지자 한시름 놓은 박태성은 청진빌딩으로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청진빌딩 3층에서 택견 도장을 운영하고는 있어도, 실상은 청진빌딩의 관리인 격으로서 녹을 먹고사는 박태성은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1층으로 나왔다. 스스로 위축되거나 시름에 잠긴 날이면 태성은 지하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3층에 있는 그의 택견장으로 가곤 다. 


1층 해누리의 강서준은 어사 출두의 행세라도 갖춘 듯한 박태성의 기세를 흘깃거리며 못마땅한 얼굴로 고주연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박관장은 무슨 벼슬이라도 하고 오는가 보오. 행세가 아주 그럴싸한 정치인 같지 않수?"


고주연은 이미 강서준에게 먹은 마음이 있는 여자라서, 이제는 박태성이든 주성훈이든 남의 일이 된 지 오래다. 고주연이 비록 남편 없이 지낸 지가 오래되었지만, 동시에 이 남자 저 남자를 마음에 품거나 몸을 주거나 하는 것은 바람직한 연애의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다다익선이 좋기도 하겠지만, 고주연은 한 사람과의 관계가 끝나고 나서 다시 새로운 만남을 갖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대전 동창과의 관계가 끝난 지도 한참 되었건만, 강서준은 여태껏 그녀를 품으려고 덤벼들질 않는다. 그래도 주연은 한 여름 내내 아이스커피로 강서준을 그녀의 치마품에 가까이 데려다 놓았다. 이제 고지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고주연은 직감하고 있다. 남자가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그 순간을 만드는 것이 여자의 기술이고 재능이다.


"박관장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든 내 알 바 아닌 걸요~ 내 눈엔 서준씨만 보여서요. 호호호~ 그나저나 요즘 꾸에로 사장이 안 보이네요. 어머니 돌아가시고 그렇게 일만 하더니, 어디 휴가라도 떠났나 보죠?"


"이사장이 휴가를 떠났든 밀월여행을 갔든 내 알 바 아닌 걸요~ 내 눈엔 주연씨만 보여서요. 하하하~ "


강서준은 고주연의 말투를 흉내 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요즘 들어서 강서준과 나이가 동갑인 여자 고주연이 가끔 서른 살 여자처럼 이뻐 보일 때가 있어서, 서준도 아리송할 때가 있다.


박태성은 3층 수련관으로 곧바로 들어가질 않고, 4층 꾸에로 공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은정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꾸에로 직원의 말대로라면 이은정은 오늘 공방에 출근을 했어야만 한다. 아내의 죽음 이후 두 계절이 지나는 동안 청진빌딩에 나타나지 않았던 주성훈이 말루스에서 이은정과 커피를 마시고 갔다는 소식을 박태성이 신재희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 태성의 가슴에서 무언가 탁하게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었다. 주성훈이 진짜로 이은정을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무리 곱씹어 생각해도 답을 알아낼 수가 없는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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