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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Aug 02. 2022

(소설) 아담과 애플 27

주문한 오동나무가 이미 손질된 상태로 며칠 전 '꾸에로' 공방에 도착했다. 은정은 세심하게 치수를 다시 재보고 구석구석 대패질을 또 한 번 한 뒤에 천으로 닦고 문지르기를 서너 번 하였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천연염료를 희석해서 원하는 색을 나무에 입혀놓았었다.


공방 유리창 너머로 첫눈이 희미하게 흩날리는 것 같았다. 직원들이 퇴근하고 난 뒤에 혼자 공방에 남아 미리 재단해두었던 가죽을 나무에 꿰어 튼튼한 의자 하나를 만들고 나니 어느덧 시계는 밤 열 시에 닿아 있었다. 성훈의 일행들과 바다로 첫 세일링을 나갔던 날, 은정의 머릿속에 떠오른 성훈의 의자였다. 은정은 성훈에게 제왕의 의자가 아니라, 한 남자의 의자 하나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세일링을 다녀온 지도 벌써 석 달이 지났다. 성훈과 친구들이 만들고자 했던 새로운 정당을 위한 창당 조건을 갖추는 사이, 석 달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주성훈은 주로 서울에서 생활하며 창당 활동에 전념하느라, 그동안 은정과 사적으로 만난 건 단 한 번 뿐이었다. 그것도 청진 일보에 업무차 들렀다가 '말루스'에서 커피 한 잔을 따로 마셨을 뿐이다.


성훈을 위해 완성한 의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은정이 창밖으로 날리는 하얀 눈가루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을 때였다. 늦은 시각에 그녀의 휴대폰이 울리고 거기엔 주성훈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오 분 후 그녀의 공방으로 성훈이 올라왔다.


"첫눈이네요. 은정 씨와 첫눈을 함께 하고 싶어서 달려왔어요."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올라온 성훈의 어깨는 말끔했다. 첫눈이 오는 날 한 여자를 생각하며 160킬로를 달려오다니, 그건 분명 감동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이는 여전히 정중했다.


"이럴 땐 포옹이나 키스가 어울릴 것도 같은데, 우리에겐 그런 게 아직 어색하네요. 중앙당에서 지도부가 내려오신 기분인 걸요~ 후훗"


은정은 자신의 입 밖으로 나오는 말들이 스스로도 기가 막혀서 속으로 탄식하였다.


"이 동지, 반갑소~"


주성훈이 은정의 탄식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이 동지"라 호명하면서도 은정을 그의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은정의 귓가에 나지막하고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성훈이 "보고 싶었어요."라고 속삭였다. 포옹과 키스의 단계별 매뉴얼이라도 있는 것처럼, 은정의 고개가 들리면서 두 사람은 첫 키스를 나누었다. 뜨겁지 않은 다정하고 친밀한 키스였다.


은정은 성훈을 "그의 의자"에 앉히고 자몽티 한잔을 건네주었다. 인생의 첫 키스도 아닌데, 은정은 성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지금 내리는 첫눈이 그치고 며칠이 지나면 은정은 곧 마흔다섯의 여자가 된다. 은정은 성훈에게 아무 제안도 아무 욕심도 가질 수 없는 입장이다.


"이 의자 너무 편한데요~ 은정 씨가 만든 건가요?"


"네, 성훈 씨 드리려고 만들었어요."


은정은 제왕이나 정치가의 의자가 아니라, 그저 한 남자로서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을 주고 싶어서 의자를 제작했노라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여자가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의자와 남자가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의자는 조금 다르다는 것이 은정의 생각이다. 성훈이 한 남자로서의 인생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마음 상태에 이르려면 아직 멀었다고 은정은 생각하고 있다.


성훈은 은정의 그런 면들이 좋았다. 구구절절하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덧붙이거나 애쓰지 않고, 간략하고 평이한 한 줄의 문장 속에 모든 것을 꾹꾹 눌러 담아내는 그녀의 심성이 보기 좋았다. 섹시함은 신체는 물론이거니와 정신세계에서도 요란한 치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음 주에 정식으로 우리 당이 대한민국에 정당으로 등록되고 나면, 내년 지방선거에 시장으로 출마해 볼 생각이에요."


"아~ 네. 지금처럼 바쁜 시간들의 연속이겠군요."


"지난여름에 제가 왜 은정 씨를 요트에 초대했던 것 같아요? 앞으로는 제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언제나 은정 씨가 함께 하길 바래서였어요. 창당대회 그런 자리는 제게 중요하지 않아요. 제 인생에서 어떠한 결심이나 선택을 해야 할 때, 그때가 의미 있고 중요한 거죠. 시장 출마 계획도 은정 씨에게 처음 말하는 거예요. 폭죽이 터지는 파티에 은정 씨와 동행하는 것도 의미 있겠지만, 함께 별을 바라보며 우리의 꿈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거기까지 말을 내뱉고는 성훈이 실수라도 저지른 어린 사내아이처럼 얼굴을 붉히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러고 보니 제가 은정 씨의 꿈을 물은 적이 없던 것 같기도 하고, 지난겨울 산행에서 은정 씨의 꿈은 사랑이라고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하하"


성훈이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은정의 두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였다. 십여 분 전 키스를 나눈 남자의 눈빛 속에 그녀가 찾는 '사랑의 확신'이 들어있는 것인지 은정은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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