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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Oct 04. 2022

애매한 나들이

혼자 거실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던 남편이 무언가를 본 모양이었다. 몇 달 후 졸업을 앞두고 취업준비 중인 작은 아들의 면접용 슈트를 사기 위해 아들과 아울렛 매장을 다녀올 때였다. 남편은 마누라를 납치라도 하는 듯이 그의 차에 태우고는, 토요일 오후 세 시에 익산으로 출발했다.


상세한 조사나 계획 없이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는 남편의 본성이 또 한 번 기질을 발휘하려는 것 같았다. 삼일 간의 연휴가 시작되는 토요일 오후는 당일치기로 다른 지역 나들이를 시작하기엔 조금 애매한 타이밍 같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디 돈을 걸고 계약하는 위험한 일도 아니니 일단 군말 않고 남편을 따르기로 했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로 진입하려는 이미 고속도로는 주차장이 되어있었다. 저녁 무렵이 되어 도착익산의 서동공원에는, 백제의 서동과 신라의 선화 공주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는 축제답게 어린 자녀들을 동반한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공원으로 가는 길에는 매우 신기한 동물농장이 하나 있었다. 낯이 익은 여러 종류의 동물들을 커다란 마당에 한꺼번에 풀어놓았으나, 서로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툼이나 괴롭힘은커녕 오히려 더 평화롭고 재밌게 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뒤에 누가 따라붙든지 상관하지 않고 저 혼자만의 산책을 즐기려는 것처럼 농장 안을 거니는 수사슴 바로 뒤에서, 한 마리의 암사슴이 수사슴을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런 암사슴의 뒤꽁무니에 바짝 붙어서 틈만 면 제 얼굴과 하체를 암사슴에 비벼대며 구애하는 숫양의 뻔뻔한 욕망마저 오히려 관람객들의 웃음을 자아냈.


한참 동안 수사슴과 암사슴, 그리고 숫양의 삼각 릴레이는 계속되었다. 암사슴을 향한 숫양의 행동을 스토킹으로 간주하고 농장 측이 어떠한 대책을 마련할지 의문이 드는 사이에, 숫양도 지쳤는지 암사슴에게 치근덕거리던 구애를 멈추고  무리 속으로 어슬렁거리며 돌아갔다. 뒤돌아가는 녀석의 하체 쪽에는 소젖보다 더 큼지막한 생식기가 털럭거리며 달려있었다.


그 옆으로 세 마리의 닭들이 농장을 트랙 삼아 경주하듯이 둥글게 달리고 있었다. 덩치가 제법 큰 동물들은 폭주족처럼 질주하는 닭들의 이벤트를 바라보며, 귀찮은 기색이나 나무라표정도 없이 저들끼리 무심하게 어울렸다. 모두가  자리에서 평화로워 보였다.


동물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는 남편이, 벤치 옆으로 흩어져 있는 건초들을 한 움큼 집어서 농장 울타리로 다가갔다. 양들과 라마 두 마리와 사슴이 다가와서 건초를 맛있게 받아먹었다. 아래턱을 활기차게 움직이며 질겅질겅 건초를 씹어먹는 라마의 순진해 보이는 눈빛 속가을 저녁이 느리내려앉고 있었다.


불꽃을 내뿜으며 사람들을 태운 붉은색 열기구가 어두워진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환호성을 터뜨리는 아이들 옆에서 부모들은 열기구 탑승을 기다리며 줄을 서있었다. 급작스럽게 나들이를 제안한 남편은 축제가 몹시 마음에 든다는 표정을 애써 지어 보였다.


서울에선 미스터 윤 퇴진 집회가 열리고 있다는데, 애매한 오후 시간에 출발해서 애매한 느낌으로 익산 축제장에 와있노라니, 얼추 늙은 부부 사이마저 어딘지 애매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부부는 꼬맹이들이 좋아하는 축제에 서 저녁도 굶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누라는 집에 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라면 물부터 올렸다. 아홉 시 애매한 시간, 라마의 눈빛을 애매하게 닮은 것도 같은 남편과 라면을 맛있게 먹으며 늙은 마누라가 한마디 했다. 


"어린애들 많은 데는 이제 가지 맙시다. 우리 나이가 뭔가 애매한 것 같지 않수?"


번쩍거리불빛들과 꼬맹이들이 많은 곳에는 나중에 자식 놈들 결혼해서 손주 볼 때나 따라다니고 싶어 지려는지 그건 알 수가 없지만, 지금 나에게는 나무와 새들이 있는 숲 속이 가장 즐거운 나들이 장소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왕 나들이 선물을 하려거든 무조건 산으로 데려가 달라고 남편에게 부탁했다. 마누라는 늙고 있는데, 아직 남편은 눈요기 축제가 더 재밌는 젊은이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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