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라지 Oct 05. 2022

늙은 공주님

자식 놈들이 크니까, 늙어가는 어미가 자식 놈들 스케줄에 맞춰 삶을 살아간다. 분명히 내 이름으로 등록된 차인데도 불구하고, 자식 놈이 타지 않을 때 얼른 바깥 볼 일을 보고 돌아오기 일쑤다.


그래서 오늘도 오전에 마트엘 다녀왔다. 신선식품 할인은 당일 저녁 늦게이거나 혹은 다음날 오전에 만날 수가 있다. 오전 열 시 반에 문을 여는 마트 문 앞에 사람들이 기다랗게 줄을 서있었다. 새로 첫 오픈하는 마트도 아닌데 별 일이었다. 아마도 열 시 반 오픈에 맞춰 장을 보려고 일찌감치 나온 고객들이지 싶었다.


그러고 보니 시계는 열 시 이십육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도 그 줄에 막 합류하려고 할 때였다. 그 줄에 섞여있던 어느 작은 여자 아이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와아~공주님이다."


순간 그 줄에 서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쏠렸다. 아이의 손을 잡고 있던 젊은 엄마가 내 얼굴을 확인하며 무안해하는 사이, 나는 엉겁결에 놀라서 줄의 맨 끝으로 부리나케 몸을 숨겼다. 늙은 아줌마더러 공주님이라니~ 죄지은 것도 없이 공연히 부끄러워서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린 여자아이가 나를 가리키며 "공주님"이라고 표현한 것은 엄연히 스커트 때문이었다. 몇 해전 샤랄라~한 롱스커트를 하나 샀는데, 그게 하필이면 화이트에 가까운 아이보리색이라서 여자애 눈에 공주옷으로 비쳤던가 보다. 게다가 늙은 아줌마가 긴 머리를 따서 묶었으니, 판단력이 미숙한 어린애 눈에 언뜻 공주님 스타일 흉내쟁이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그 아이의 마음 속 진짜 표현은 이러했음이 틀림없다.


'와아, 공주님 옷이다~'


줄에 서있던 사람들 가운데는 늙은 아줌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려는 사람도 있었다. 다행히 청자켓과 어울리는 푸른빛의 야구모자를 쓰고 있어서, 나의 이목구비는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거기에 코로나 마스크가 늙은 여자의 얼굴 가리는 걸 거들어주었다.


마트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질서 있게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평소보다 더 빠른 걸음과 몸짓으로 부지런히 장을 보고 서둘러 거기를 빠져나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자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육류 제품 때문에 집으로 곧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셀프로 뿌리 염색을 하고 있는 늙은 여자가 긴 머리를 유지한다는 게 보편적이지 않은 건 사실이다. 친구들은 이십 대를 마무리하면서 대부분 짧은 머리들로 스타일 노선을 바꾼 지 오래다.


오십 대의 아줌마가 이십 대부터 가지고 있던 헤어 스타일과 복장 스타일을 고수한다는 건, 어찌 보면 유물스럽고 나아가 흉물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책임을 공유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세대별로 정해진 의상 컨셉이 있는 건 아니지만,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복장은 나이 든 사람으로서 가급적 피하는 게 도리이 싶다.


철없고 분별력 없는 어린아이의 뜬금없는 신상 공격에 내 마음이 아직 어질어질하다. 일단 헤어스타일은 못 바꾸더라도, 당장 저 샤랄라~한 스커트부터 입지 말아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애매한 나들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