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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Oct 12. 2022

핌블의 겨울

오늘은 세계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개시한 날로부터 무려 230일이나 된 날이다. 올해 2월 겨울의 끝자락에서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아직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다시 겨울이 찾아오려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모든 전쟁의 뒤편에서 이득을 보고 있는 나라가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지도 않을뿐더러, 전쟁 관련주를 분석하여 주가를 전망하면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는 사람들도 많은 세상이라는 것이 놀라울 것도 없다.


러시아는 동유럽에서 북아시아까지 걸쳐 있는 유라시아 국가로서, 인도유럽어족의 슬라브어파에 속하는 슬라브족이다. 슬라브 민족은 고전 고대 세계와의 접촉이 적었기 때문에 게르만 민족 등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문화, 사회의 발전이 늦어졌는가 하면, 신화 부분에서도 역시 유럽의 신화 중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마저 대부분 구전으로만 전했기 때문에 문서로 남아있는 자료가 매우 적단다. 이반 3세가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동생의 딸과 결혼하여 동로마 제국의 혈통을 받아들이면서, 러시아는 문화적으로 기독교에 매우 강하게 동화된다.

 

동유럽 신화라고도 하는 슬라브 신화는 기독교화 이전의 슬라브족이 믿었던 다신교 신화를 말하는데, 슬라브 신화의 두드러진 특징은 세계의 창조를 물에서 본다는 점이다. 즉, 태초에 우주에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바다만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후에 기독교 위경이 슬라브 쪽에 많이 퍼져 기독교적 세계관도 슬라브 신화와 전설에 영향을 많이 끼쳤다고 하지만, 그와 더불어 인도 신화의 영향 또한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의 도래 이후 슬라브 신화의 창조신은 기독교의 절대 유일신으로, 부속신은 악마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슬라브 민속문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존재인 "마녀(witch)"는 슬라브 문자로 표기될 때 '베드 모이-아는 자(knower)'란 의미라고 한다. 아마도 우리가 가장 많이 들어본 슬라브 신화 속 마녀는 "바바 야가(Baba Yaga)"라는 이름을 가진 마녀일 것이다.

 

유명한 캐릭터가 별로 없는 동유럽 신화에 비한다면, 게르만 신화라고 알려진 북유럽 신화 속의 인물들은 훨씬 더 다양하고 유명하며 스토리도 풍부한 편이다. 마블 영화 시리즈에 등장하는 오딘, 토르, 로키 등이 바로 북유럽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함께 유럽의 2대 신화를 이루고 있는 북유럽 신화는 '신의 탄생-신의 부흥-신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구조이다. 신들이 풍족하게 살아가는 그리스 신화와는 달리 분위기부터가 매우 염세적이고, 종말에 맞서 싸우는 대목이 되면 살벌하고 끔찍한 장면들이 많은 것은, 게르만족이 살던 춥고 냉혹한 지리적 상황과 거친 생존 방식 속에서 형성된 심성적 측면을 반영한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그들에게 안락한 삶보단 영광스러운 죽음을 더 높은 덕목으로 취하게 하였기에 북유럽 신화는 비극적 세계관일 수밖에 없다.

 

북유럽 신화 전체를 지배하는 비장함과 황량함의 뿌리는 세계의 종말인 '라그나로크'로 나타난다. 신들은 이 운명을 극복해보려 노력하지만 마침내는 종말을 맞는 결말이 북유럽 신화가 다른 신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보여준다. '라그나로크'는 '세계 종말의 날'로, 성경의 아마겟돈을 연상케 하는 사건이다. 라그나로크를 직역하면 "신(지배자)들의 운명"이라는 뜻이지만, 독일에서 이것을 바그너가 그의 악극 <니벨룽의 반지>에 쓸 때 '신들의 황혼'이라는 말로 차용한 뒤로 '신들의 황혼'이라는 표현 또한 자주 쓰이고 있다. 비록 오역이기는 하지만 '황혼'과 '몰락'을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정서와, 황혼이라는 단어가 주는 시적인 분위기가 꽤 멋있게 느껴졌기 때문인 듯하다.

  

라그나로크에는 신들을 비롯한 모든 존재들이 극복하기엔 너무 거대하고 엄혹하며 파괴적인 추위와 냉기의 계절인 "핌블의 겨울"이 등장한다. "핌블의 겨울"이 덮쳐 오면 그동안 제어되었던 모든 악신과 괴물들이 출몰하게 되고, 오딘을 비롯한 모든 신들이 그들에 맞서 결전을 벌이게 된다.   

 

제1차와 2차의 세계대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들과 지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상황 역시 "핌블의 겨울"이다. Germany라고 표기되는 독일의 이름에서 보듯이, 독일은 스스로 게르만 민족임을 내세우며 민족 국가의 틀을 잡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개시 몇 시간 전, 침공 징후가 명백해지자 주독 우크라이나 대사가 독일에 다급하게 지원 요청을 했을 때 독일 외무부 장관이 이렇게 말했단다. "곧 없어질 나라에 지원해 뭣하느냐?"


끝이 보이지 않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 사람이 오랜 시간 견디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향해 저주를 퍼부을 때가 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 입에서 "세상은 그래도 살만 한 곳이야."라는 말 대신에 "세상이 다 같이 멸망해버리면 좋겠어."라는 참담한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아스가르드(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땅)'에서 악신 푸틴을 무찌를 신의 전사라도 소환해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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