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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Oct 18. 2022

익어가는 가을

세월이 참 빠르기도 하다. 작년 9월에 브런치 시작하고 첫가을을 맞이하면서 발정난 암캐처럼 미친 듯이 글을 써댔었는데, 그 시간들마저 벌써 일 년 전의 기억 속으로 묻혀 들어갔다.


가을만 되면 괜스레 멜랑꼴리 해지는 늙은 우리를 향해 누군가 그것을 갱년기 여성의 우울감이라고만 치부해버리는 것이 별로 타당해 보이지 않는 것은, 가을 하늘은 미치게 파랗고 처절하게 눈부신 까닭이다. 지구과학 쪽 지식이 없어도 너무 없는 나에게 가을 하늘이 아름다운 이유를 설명해보라고 하신다면 딱히 드릴 말씀이 없지만, 시간의 법칙에 따라 여름과 겨울 사이에 끼워져 있는 가을의 정취는 묘하게 쓸쓸하면서 멀쩡한 신체에도 아릿하게 저려오는 통증을 수반한다.

  

이런 가을에는 외간 남자의 뒤통수라도 슬쩍 훔쳐보고 싶을 때가 있다. 물론 집에 계신 늙수그레한 아저씨의 머리숱이 듬성듬성한 뒤통수와 비슷해 보이는 그런 뒤통수를 훔쳐보고 싶은 것은 결코 아니다. 똑바로 보는 것도 아니고 슬그머니 훔쳐보는 건데, 구태여 집에 계신 분과 비슷한 뒤통수를 쵸이스 할 바보탱이는 없을 것 같다.


외제차 수리점의 잘생긴 젊은 사장 얼굴이라도 일 년에 한두 번 보려면 변변찮은 외제차라도 가지고 있었어야 하는데, 직장 생활 2년 차 큰아들 놈의 새 차가 들어오게 되면서 그 오래된 재규어를 지난달에 중고매매상에 팔아넘겼다. 외제차 구매 계획이 아직은 없으므로, 영영 그 멋진 사장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젊고 멋진 뒤태를 가진 남자는 아니어도 늙수그레한 뒤통수의 남편과 또 무주를 다녀왔다. 연고가 있는 지역도 아닌데, 산과 물이 어우러져 있는 무주의 매력에 빠져서 지난여름부터 매 주말마다 무주를 드나들고 있다. 더 나이 들어서 남편이 하던 일을 그만두게 되면, 전세살이라도 옮겨가서 살아보고 싶은 지역 가운데 한 곳이 무주군이다.


복숭아밭에는 누런색 빈 봉지가 매달린 복숭아나무들이 서있고, 사과나무에는 빨갛게 익어가는 사과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도로가에 서있는 감나무에서 잘 익은 홍시를 발견한 마누라의 지령대로 남편은 차를 돌려 감나무에 다가갔다. 국공유지가 분명해 보이는 도로 가이지만, 내 땅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늘 쫄보가 되는 마누라를 대신해서 남편은 신속하게 홍시 다섯 개를 가지고 돌아왔다. 점퍼 양쪽 주머니에 작은 홍시감을 한 개씩 집어넣돌아온 남편의 양손 바닥 위엔 세 개의 홍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등이 터져서 아슬아슬하게 제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음 주엔 장대 가지고 나와야겠어~"라고 말하는 남편에게, 늙었는데 쫄보이기까지 한 마누라가 대꾸했다.


"아이고, 그러지 맙시다. 나라 땅이든 시 땅이든 우리 땅 아니면 장대 써서 는 건 좀 아닌 것 같소. 남들 보기에 좀 민망하구려."


"시골 어르신들, 저거 따지도 못해. 지금도 새들이나 저거 쪼아 먹는 거 보이잖아. 다 떨어져서 길바닥만 더러워지느니, 우리라도 몇 개씩 따서 먹으면 좋은 일이지. 손이 닿는 아래엔 사람들이 따가 높은 데 잘 익은 놈들이 더러 있으니까, 다음 주엔 미리 장대를 차에 실어 놓아야겠어."


남편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도 세상인심이란 것이 세월 따라 변해도 너무 변해버렸기에, 나는 남편 말에 적극 맞장구를 칠 수는 없었다. 각 지자체마다 가로수 열매 채취에 관한 지침 또한 다르다고 마누라가 넌지시 아는 체를 해보았다. 


잘 익은 홍시를 보니 입맛이 돌기도 하거니와, 바닥에 떨어지면서 등이 터져버린 홍시 하나를 빨리 먹어치우는 것이 급하기도 하여 가까운 농협 마트에 들렀다. 늙수그레한 부부 홍시를 가지고 화장실 가서 씻어오는 일을 누가 할 것인지 긴급하게 논의를 했다.


"남자가 가는 게 겠어요. 다 늙은 아줌마가 쪽 팔리는 것보다 씩씩한 아저씨가 쪽 팔린 게 낫지 않겠수?"


당첨된 씩씩한 아저씨가 농협 하나로마트 화장실에 가서 씻어온 홍시 하나를 반으로 잘라서 늙어가는 부부가 맛있게 먹었다. 줍고 씻고 하는 건 남편 몫이고, 반으로 잘라서 더 큰 쪽을 먹는 건 마누라 몫이다. 무주엔 젊고 멋진 남자 뒤통수는 없어도, 잘 익은 홍시가 매달린 주인 없는 감나무는 있었다. 감도 익고 가을도 익고, 나도 남편 옆에서 또 한 해 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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