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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Oct 21. 2022

강낭콩과 밤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잘 익은 강낭콩을 수확하며 친구 A의 어머니는 자식들 먹일 생각에 힘들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걸 또 일일이 까는 일 역시 밭에서 콩을 따는 일만큼이나 만만치 않게 고달프다. 친구 A의 어머니가 하나씩 까서 비닐팩 속에 담아 놓았던 강낭콩을, A는 주저 없이 그녀의 냉동실에서 봉지째로 꺼내서 내게 건네주었다. A의 어머니는 그 강낭콩이 우리 집 식구들 입 속에 들어갔을 줄을 까맣게 모르고 계실 거다.


며칠 전엔 잘 먹지 않는 소주 생각이 나서 대학 동기 B와 감자탕 집엘 들어갔다. 오십 넘은 아줌마는 이제 술친구로도 보이지 않는 건지, 선배들조차 술 먹자는 연락을 주지 않는다. 이만큼 살면 해가 지면 달이 뜨는 이치처럼 구태여 오지 않는 임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순리로 받아들이게 된다. 감자탕이 맛있었던 탓일까, 남자 멤버 없이 먹는 술이 그렇게 달달할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후훗~ B도 여자와 단 둘이 술 먹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뭐지? 여성성의 실종과 인간성의 진보일까, 감자탕과 소주의 상관성일까?


그날 B와 함께 먹은 술은 소주 세 병이었다. 취하지도 못한 채 두 여자가 여덟 시 사십 분을 가리키는 시계를 올려다볼 때쯤, 가을 햇살 속 라운딩을 즐기고 저녁식사까지 마친 무알콜 남편이 콜택시를 자청하고 나섰다. 구태여 오신 남편 차를 얻어 타고 그녀의 집에 가는데, B가 훌륭한 와인이 있다고 극구 우리 부부를 그녀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와인을 한 잔씩 맛만 보고, 남은 와인병과 B의 냉동실에 있던 깐 밤 봉지와 보리쌀 한 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도둑질도 습관이라더니, 친구들 집에만 가면 뭐라도 받아오는 이 몹쓸 손버릇을 칭찬해야 하는 건지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지 대놓고 묻기도 난감해진다. 모친을 '강여사'라고 부르는 친구 B의 호칭이 듣기에 좋았는지, 며칠 뒤 B에게 보내는 톡에서 나는 '강여사님'을 언급했다. 강여사님께서 밤 껍데기를 까느라 고생하셨을 것을 생각하며, 나는 보리쌀과 밤을 넣은 밥을 맛있게 지어먹는다.


나의 친정어머니는 삼십 년 세월 동안 병든 두 딸을 돌보느라, 강낭콩을 딸 겨를도 밤껍질을 깔 여유도 없이 사셨다. 신체의 병보다 정신의 병이 더 무서운 것은, 옆에서 살아가는 가족들의 삶을 시커멓게 집어삼켜버리기 때문이다. 딸들이 언제 이상한 행동을 할지 알 수 없기에, 구순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지금도 쪽잠을 주무신다. 늙은 무릎으로 아직도 기도를 하시느라 어머니의 세월은 처연하게 흘러갔다. 어머니들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며, 나는 A의 어머니와 B의 어머니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기도드린다. 얻어먹은 게 있으면 반드시 무엇으로라도 갚아야 인간이다.


세상에는 매일 수많은 삶과 죽음들이 오고 간다. 모든 계절 모든 시간 속에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는 것을 깨우치는 순간부터, 나의 존재는 새롭게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며칠 전 동네에서 후진하는 수산물 트럭에 치여 숨진 아이와, spc회사에서 일하다가 목숨을 잃은 20대 여성과, 기어를 후진에 놓고 주차 상태를 확인하려다 자신의 실수로 죽음을 맞이한 사십 대 여인.. 이 모든 죽음들이 순식간에 예고도 없이 벌어진다는 것이 차마 믿기지 않지만, 우리들의 삶은 또 흘러가고 있다.


아파트 도로 건너편에 있는 뚜레쥬르 빵집에 오랜만에 사람들이 붐빈다. 도로를 건너지 않아도 되는 파리바게트에 드나들던 주민들이, 빵을 사러 일부러 도로를 건너고 있다. 우연하고 슬픈 죽음으로 인해 동네 빵집의 판도가 바뀌고, 파리바게트 주인장은 또 소리 없이 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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