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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Oct 27. 2022

건강검진

해마다 이맘때면 마음이 괜히 조급하고 분주해진다. 게다가 올해 해야 할 건강검진도 아직 하지 못했다. 첫눈이 내리기 전으로 기억되는 걸 보니 작년 이쯤이었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하여간 연하의 잘 생긴 남자와 단 둘이서 노래방을 갔던 기억이 불쑥 튀어나온다.


그 사건이 왜 그리 중요한가 물으신다면, 사회적으로 접대를 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닌 늙은 여성이 젊은 남성과 단 둘이 술을 먹고 노래방을 가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기 때문이라고만 답하련다. 결국 이것은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녀의 여성성의 생존을 확인하는 또 하나의 척도일 수도 있음이니, 내겐 매우 중요한 사건이며 기억임에 틀림없다. 질투를 하시든 욕을 하시든 독자님들 마음대로 하셔도 무방하지만, 타인의 기억과 논리를 존중하는 성숙한 의식의 독자님들이 아무려면 내겐 좋을 것도 같다.


오십이 넘으면 어찌 됐든 매사에 조심스러워지는 건 확실하다. 산길을 걸을 때도 내리막길에선 한 발 내딛는 것조차 더 신중해지고, 사람 관계에서도 상대방의 상태와 그의 주변 환경의 변화마저 다각도로 고려하게 된다. 이러한 신중함과 조심스러움이 꽤나 율적일 것 같다가도, 어떤 때는 이런 것들이 즉흥적인 열망보다 오히려 사람 관계를 더 서먹하게 만들기도 한다. 별 것도 아니지만 세상은 온통 아이러니한 것들 투성이다 보니, 가끔 내가 먼저 연락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헷갈릴 때도 있다.


이틀 전이었나 보다. 나의 신중함과 즉흥적인 콧바람이 버무려져 신호탄을 쏘아 올린 날, 후배들과 술이 있는 저녁을 먹고 노래방엘 갔다. 일 년 만에 간 노래방이어서 무엇을 불러야 할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였다. 겨우 한 곡이 생각나서 최선을 다해 불렀는데, 어라~ 점수가 요상하게 낮았다. 내 평생 노래방에서 받아본 점수 중에 최저 점수가 나왔다.


"나 부를 때 중간에 끄지 마. 점수 꼭 확인해야 한다~"


왜 그렇게 점수에 연연하느냐고 묻는 후배에게 내가 짐짓 단호한 어조로 답을 했다.


"늙었다고 목소리조차 기운이 없어서 점수가 안 나오는 건지, 아니면 오늘 저 기계가 유난히 짠 건지 궁금해서 말이야. "


나보다 젊은 후배들이 노래를 불렀을 때도 점수는 역시 후하지 않았다. 후배들의 낮은 점수에서 위안을 얻으며 드는 생각에, 그렇다면 여기 노래방 기계가 유난히 점수를 인색하게 매기는 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시 심기일전하여 늙은 아줌마가 목표 점수 "96점"을 외치며 도전을 마쳤을 때, "짜잔~ 98점"이 나오고야 말았다.


"애들아, 봤지? 98점 오늘 최고 점수네~ 흐흐흐"


'그래, 내가 아무리 갱년기라지만 노래방 기계에 무시당할 만큼 늙지는 않았지~'라고 속엣말을 중얼거리며, 최고 점수를 받은 내가 데스크에 가서 기분 좋게 계산을 했다. 다음에 노래방을 가야 한다면 기필코 다시 와서 반드시 이 기계에서 "100점"을 받으리라 우스운 다짐까지 하였다.


건강검진을 병원에 가서 할 일이지 구태여 노래방에 가서 할 필요까진 없겠지만, 일단 노래방에서 목청껏 소리를 질러댈 수 있고 높은 점수를 획득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날 내 건강은 1등급 금메달 기분이었다. 그래도 해가 바뀌기 전에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해야 할 텐데, 노래방 갈 때 심정과는 다르게 조금 긴장이 된다. 병원에 가서 피 뽑고 내시경 하고 이러는 거 하지 않고,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건강 상태를 체크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개발되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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