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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Oct 31. 2022

해운대

영화의 인트로에서 나는 가끔 바짝 긴장할 때가 있다. 그런 긴장감이 엄습하는 것들은 대부분 사랑을 주제로 하는 영화들인 것 같다. 남편과 함께 본 영화들의 인트로에선 긴장한 적도 없을 뿐 아니라 잘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것은, 남편은 주로 액션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오래전 개봉했던 <냉정과 열정 사이>를 한국에서 보지 못하고, 작은 아들과 단 둘이서 떠났던 유럽 여행 도중에 피렌체로 향하는 이태리 버스 안에서 처음 보았다. 패키지여행의 가이드가 미리 준비해 놓았던 영화를 틀어주며, 피렌체로 가기 위해선 예습처럼 이 영화를 꼭 보아야 한다고 말했었다. "The Whole Nine Yards"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음악으로 시작되는 <냉정과 열정 사이>는, 도입부에서 여주인공의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피아노 선율 위에 덧입혀지며 내려앉는다.


"피렌체의 두오모는 연인들을 위한 성지야.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장소지. 언젠가 함께 올라가 줄래?"


풀숲에 이는 바람을 닮은 듯한 여주인공의 목소리가 형체도 드러내지 않고 이렇게 말할 때, 두 사람 신체의 일부인 두 개의 손만 화면에 등장하여 그림을 그려가는 장면을 통해서 그녀와 함께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는 당연히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다.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들은 모두가 소설이나 영화 속에나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아들과 함께 피렌체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런 생각을 했던  같다.     


지난 금요일에 남편과 부산으로 업무차 출장 여행을 떠나면서, 나는 몇 해 전 피렌체행 버스 안에서 보았던 <냉정과 열정 사이>를 떠올렸다. 다현이의 트로트를 공연장에서 직접 듣기 위해 일찍 퇴근하는 남편의 트롯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마누라의 감수성도 만만치 않은데, 아직도 남편은 그의 마누라가 애절한 사랑 이야기 따위엔 관심조차 없는 무감각한 아줌마인 줄로만 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다..


남편의 사업과 관계있는 출장을 떠날 때마다, 우리 부부는 대체로 한 팀으로 움직인다. 남편의 사업체는 규모가 매우 작아서 따로 인력 충원을 하지 않고 마누라가 비서 겸으로 함께 동행을 하곤 한다. 혹시나 해외 나갈 일이 있을 때도 우리 부부는 2인 1조가 되어 어떻게든 꾸려나간다.


나의 업무는 사전 예약 등의 일이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관상가 노릇까지 할 때가 있다. 국내인이든 외국인이든 사기꾼을 알아보는 눈은 남편보다는 마누라 쪽에 있는 까닭이다. 법사도 아니고 관상가가 아니어도, 자신의 기술과 가진 것을 솔직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주변의 것들을 가지고 와서 마치 내 것처럼 떠벌리는 놈들을 알아보는 건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세상의 어느 구석에나 사기꾼은 있기 마련이다. 서울 역삼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는 나이 지긋한 여자가 남편을 마치 시골 중학생 다루듯이 대하며 남편과 명함을 주고받는 사이에, 나는 그녀 회사의 제품에 관한 설명을 보기 위해 팸플릿을 먼저 훑어보았다. 실제 생산되는 제품이 중요한 것이지 요란한 언변과 회사의 약력 따위는 그다음이다. 두 개 업체 미팅이 끝나고 호텔로 돌아오면서, 나는 사장인 남편에게 사기꾼 아줌마의 허위를 경고해주었다. 마누라는 얼추 제갈량 흉내를 내는 것도 같은데, 남편이 유비 흉내를 제대로 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다.


내가 남편 옆에서 제갈량 흉내를 내고 다니게 된 것은, 오로지 우리 가족 굶어 죽지 않고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남편이 일은 잘 벌리는데 수습이 좀 곤란한 부분이 있어서, 아예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을 하지 못하도록 방향을 잡아주려고 시작된 간섭이었다. 유비가 제갈량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했다지만, 우리 집은 거꾸로 내가 삼고초려하는 심정이 되어 남편이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설득하는 입장이다.


똑같은 일을 겪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밥을 먹고살지만, 사태를 파악하고 분별하는 능력은 여전히 같지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 부부는 누구의 실책을 따지기 이전에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선택을 하지 않도록 서로가 경계하고 조언을 주고받는다. 이쯤 되면 이십팔 년 차 부부의 내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서로의 부족함을 알고 보충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서로 영화와 음악에 대한 취향은 다르지만, 우리 부부는 드디어 서로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게 되었다.


그날 오후, 오래전 보았던 피렌체의 하늘보다 해운대의 하늘이 더 찬란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던 것은, 서로가 준 상처에 얽매여있지 않고 과거로부터 벗어나서 현재를 즐길 줄 아는 우리 부부의 달라진 모습 때문인 것도 같다. 해운대 푸른 바다 위로 노을이 붉어져가고, 서로에 대한 연민을 알게 된 중년의 부부가 모래사장을 말없이 한참 동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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