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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Sep 28. 2022

아울렛 벤치에서

늦게 출근하는 남편의 차를 얻어 타고 집 근처에 있는 아울렛 매장으로 향했다. 남편이 나를 내려준 곳에는 택시가 두 대 연달아 서있었다. 아울렛으로 출근하는 원들이 황급하게 택시에서 내리고, 휴대폰은 오전 아홉 시 오십칠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들의 뒤통수가 아울렛 하역장 출입구 쪽으로 바쁘게 들어갔다.


아울렛과 마트가 한 건물 안에 있는 이곳에서 나도 몇 해 전에는 며칠간 단기 알바를 한 적이 있었다. 의류가 주품목이었던 골프 브랜드 매장 알바였다. 철학과 대학원 2학기를 마친 겨울 방학이었을 것이다.


남편이 자주 다니던 골프의류 매장의 매니저에게서 직접 연락이 왔었다. 알바 필요할 때 연락을 달라고 내가 농담처럼 던졌던 말을 그녀가 기억해낼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책값이라도 벌어보려고 며칠간 매장에 나가서 일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의류 매장 일은 처음이었지만, 손님을 응대하는 일에는 어지간히 이력이 있던 터였다. 첫날부터 매출을 잘 올려서였을까, 알바 이틀째 되던 날 매니저는 나에게 품목별로 제품 분류하는 법을 가르치더니, 곧바로 서류 파일을 내 손에 건네주고는 건물 일층 뒤편에 있는 하역장 쪽으로 내려보냈다. 매니저와 오랜 기간 동안 파트너처럼 함께 일을 해온 실장이란 여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었다.


이 매장에서 한 달째 일을 하고 있던 알바 언니가 함께 하장으로 내려오면서, 품목별 분류 작업은 정확해야 하기 때문에 오래된 사람 아니고는 맡기지도 않는다고 했다. 골프 매장엔 의류 외에도 가방, 벨트, 모자, 양말 등 다양한 품목들이 있어서 연도별로 상품 코드가 달랐다. 의류도 상의, 하의 등으로 나뉘고, 상의는 다시 점퍼류, 티셔츠, 조끼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행사 기간이라 본사에서 내려온 물건들이 박스째로 벽 한쪽에 그득히 쌓여 있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를 맡으며 털모자를 눌러쓴 세 명의 아줌마가 종이박스를 방석처럼 깔고 앉아서 제품 분류 작업을 했다. 물류 제품 상하차 구역이 지상 일층에 있어서, 간이 난로도 없이 일을 해야 하는 알바 아줌마들은 얼른 작업을 끝내고 따뜻한 실내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 대전 현대아울렛 화재 참사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물류 상하차 구역이 지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안전한 것인지 그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 참사에서도 희생당한 사람들은 대개가 가난한 노동자들이었다.


품목별로 분류 작업을 마치고 다음 날, 매장의 맞은편으로 보이는 에스컬레이터 앞쪽에 우리 매장의 행사 매대가 오픈되었다. 행사 제품들 가운데는 제법 좋은 물건들이 매우 저렴하게 나와 있었다.


매니저는 나에게 행사 제품 옷을 갈아입히며 매대 앞쪽에 세워 놓았다. 내가 점퍼를 하나씩 바꾸어 입을 때마다 그 제품의 매출이 껑충 뛰었다. 어느 중년의 남성은 아무 맥락도 없이 나에게 명함을 한 장 건네주기도 했었다. 그 명함은 십분 후 화장실 휴지통으로 들어갔지만, 며칠 동안 다른 알바 아줌마들은 그걸 가지고 쑥덕거리며 나를 따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직업 훈련생은 아니었지만 무사히 일주일 단기 알바를 마치고, 바로 몇 달 뒤에 매니저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나는 학기 중임을 핑계로 그녀의 알바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또 얼마가 지나서 여름 방학 무렵에 매니저는 또 한 번 내게 알바 제안을 해왔지만, 나의 의사를 확인한 이후로 다시는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일 년 뒤쯤 아울렛에서 그녀와 그 브랜드는 자취를 감추었다.


하역장 출입구를 통해 일터로 바쁘게 출근하는 계약직 노동자들의 발걸음에서 생명의 활기가 느껴졌다. 아울렛 알바 직원들은 열 시까지 출근하기도 하지만, 고객들에게 아울렛 매장 오픈은 오전 열 시 삼십 분이다. 매장이 오픈하려면 아직 삼십 분이 남아 있었다. 노동이 주는 뿌리 깊은 생명력을 음미하며, 나는 아울렛 앞쪽의 작은 정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세상은 온통 노동의 터전이고, 삶이란 매일 해결해야 할 일들의 연속이다. 더 적게 먹고 더 적게 가지려 할수록, 삶 속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은 그만큼 줄어들기도 한다. 기분 좋은 가을 바람이  파라솔 안으로 스쳐지나갔다.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어느 순간이, 파라솔 의자 위에 앉아있는 내 마음 안에 잠시 머물렀다.


익숙한 풀벌레 소리가 다정하게 들려오던 저녁에, 며칠 전 나는 책장에서 <월든>을 다시 꺼내 들었다. 월든 호숫가 오두막집에 살며 세상의 모든 가능성을 탐구하였던 소로우의 삶과, 대전 현대아울렛 희생자들과 아울렛 노동자들의 오늘 하루를 생각하는 사이에 굳게 닫혀있던 아울렛의 정문이 활짝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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