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친구는 나의 인생을 옛날 드라마 <아씨>의 삶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친구는 나의 삶의 궤적을 통해 "인간의 생"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모두가 고등학교 친구들이다.
누구에게나 빛나던 시절이 있었겠지만, 친구들은 나에게 "빛난다"라는 표현을 아낌없이 주었었다. 중학교 땐 나를 확인하러 쉬는 시간이면 다른 반 친구들이 교실 앞으로 몰려왔다고 한다. 여고 땐 다른 반 (여)학생으로부터 편지도 받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너랑 친구가 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 말을 잘못 해석한다면 인물 자랑이나 자뻑으로 들리기 쉽다. 그러나 친구들 기억 속에 살아있는 여고생 나는, 영화 <써니>의 그녀들만큼이나 동경의 존재이기도 했었나 보다.
세월 속에 그렇게 빛나던 어린 여자애는 사라지고, 인생의 모진 시간들을 다 겪고 거울 앞에 선 늙은 누이 같은 여인만이 남아있다.
그 여인이 자기의 연애사를 기록하기로 한 건 사실 의도된 건 아니었다. 동문 밴드에 글 하나를 올렸는데, 선배 한 분이 후속편을 기대한다는 댓글을 남겼다. 아직 변변한 독자가 없는 신출내기 작가에게, 독자 한 분의 요청은 지상 최대의 명령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여인은 연작을 쓰게 되었다. 내 생애 첫 연작이었다.
매일 한 편씩 총 10편까지 쓰고, 여기서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도 아니고 개인의 지나온 삶의 역사 일부일 뿐인데, 너무 길어지면 재미도 의미도 다 없어질 게 뻔했다.
수녀회 입회를 앞두거나 혹은 입회해서 수행하는 첫 일은 자기 역사를 직접 기록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인생을 전체적으로 회고해보는 일을 통해 나 자신과 타인을, 그리고 세상과 우주를 새롭게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기에 그러하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과거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 과거의 나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번 글이 그랬다. 나는 글을 쓰며 남편을 한 인간으로서 더 잘 이해하게 됐고, 남편을 거부하기에만 급급해서 나를 소홀히 했던 과거의 나와 화해하게 되었다.
육십 즈음의 부모님도 만날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늙은이가 아니었는데, 어느새 부모님은 진짜 늙은 사람들이 되어 있다. 인터스텔라의 머피도 아닌데, 부모님 생각을 하면 자꾸만 눈물이 난다.
다 지난 일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나를 회상하며 수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다. 그리고 나의 이상형을 너무 뒤늦게 알게 되었다. 감리교 신학과 남학생도 아니고, 그리스 조각상같이 잘생긴 심리학과 남학생도 아니었다. 우리 집까지 딱 한 번 바래다주고는 기다란 정원에 빽빽하게 서있는 나무들을 보고 기겁하여, '감히 내가 어찌' 하며 돌아섰다던 천문우주학과 출신의 형이었다.
산골 마을에 한 달에 반은 살러 가는 형은, 옆집 강아지랑 숨바꼭질하며 뛰어놀다가 발목을 삐끗하는 남자다. 소년처럼 머슴처럼 때론 자연인처럼 사는 착한 시같은 남자다. 본인은 키가 작은 걸 자랑스러워하진 않지만, 그래 봐야 우리 집 남편이랑 1센티미터 차이다. 그 형이 내가 꿈꿨던 '문학책 같은 남자'일 줄, 세월이 이만큼 흐르고 나서야 알아버렸다.
남편은 더 이상, 아주 삐딱하게는 걷지 않는다. 그 어깨 교정하는 데 26년 걸렸다. 그런데 물불 안 가리고 덤비는 성질머리는 고쳐지지가 않는다. 속 많이 썩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영화 <수상한 그녀>에서 심은경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도 다름없이 똑같이 살련다, 그래야 니가 내 아들일 테니까..."
후훗, <수상한 그녀>에서 심은경 남편 쪽은 다 머리숱이 많았다. 대학교수 아들도, 반지하 손자도..
우리 집 아들들은 키도 인물도 내 쪽을 닮았다. 그런데 머리털은 아빠 쪽이다. 큰아들은 탈모 샴푸를 주문하고, 아직 대학도 졸업 못한 작은 아들은 처방전이 기가 막히다는 용한 의사쌤을 수소문한다.
머리털 방어에 분주한 남편의 얼마 남지 않은 머리를 달마다 내가 염색해준다. 그래도 나는 괜찮다. 하지만 내 아들들은? 그날 그 버스부터 타지 말아야 한다.
차마 말로 다 하지 못하는 복잡한 심경을, 애꿎은 머리털을 구실 삼아 둘러대 본다. 사랑한다면 그깟 머리털이 대수이랴~
그동안 <철학책 같은 여자, 만화책 같은 남자>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21년 9월 21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