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속 보라카이 여행기)
때는 바야흐로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말해놓고 보니, 고작해야 사 년 전이다. 2017년 12월, 큰아들은 제대를 했던 것도 같고, 작은 아들은 막 입대를 했던 것도 같다. 확실치 않다.
우리 집은 두 아들 어릴 적에 변변히 해외여행 한 번 같이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 우리는 가난했고 힘들었다. 쌀이 떨어질 때쯤 여고 동창생이 20킬로 쌀을 보내준 적도 있고, 500원이 귀해서 초등학생 큰아들 하굣길에 원하는 '달고나' 한번 마음껏 하게 해주지 못했었다.
그래도 여름이면 개천 가서 물놀이도 하고 가재, 도롱뇽 같은 일급수 애들도 잡아본 적 있다. 겨울엔 딱 한번 스키장이란 데도 가보았다. 겁이 많은 우리 식구들에겐 맞지 않는 운동이었다.
아이들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들어갈 때쯤, 우리 집에도 조금씩 볕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 비행기 타고 먼 나라도 갈 수 있을 만큼은 되었다. 그런데 아들들이 군대 가고 뭐 하느라, 정작 아이들과 함께 네 식구가 비행기를 타본 적은 없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부부가 해외여행을 다니게 되었다.
가난하게 자란 남편은 사는 게 늘 불안했다. 돈은 많이 벌고 싶은데, 직장 생활만 하다가는 부자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애들은 둘이나 뒀는데, 마누라는 백수다. 그래서 남편은 잘 나가는 회사를 그만두고 서른둘 즈음에 첫 사업을 시작했다.
먹는 장사는 안 망한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남편은 삼겹살집을 냈다. 그것도 해보니 주방 아줌마, 홀서빙 아줌마 등쌀에 아직 젊었던 남편이 혼쭐이 났었는지, 일 년 만에 문을 닫았다. 당시 자릿값이라고 하는 권리금 때문에 번 돈도 잃은 돈도 없이 그 가게는 정리를 했다.
그리고 바로 한 달 뒤, 무슨 가방과 신발을 파는 대리점을 하겠다며, 산달이 얼마 남지 않은 배 부른 마누라를 데리고 안양 쪽을 갔던 것 같다. 대리점 개업 며칠 후 텔레비전에선 IMF로 온 세상이 들썩거렸다. 예상하셨듯이 우리도 폭망했다.
그 와중에 국가에서 금모으기운동을 벌였다. 가난하지만 애국심만은 그득했던 나는, 큰애 돌잔치 때 받았던 금반지 몇 개를 국가에 복종하듯이 내다 팔았다. 어리석었다.
그 겨울에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가난해도 젖은 나왔다. 이제 돌 지난 큰아들은 둘째가 태어나던 날까지 엄마 젖을 먹었다. 새벽 세시쯤 둘째를 낳고, 그날 아침 9시에 의사가 출근하자마자 퇴원을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큰 애가 자고 있었다. 그 옆에 갓 태어난 둘째를 눕혔다. 그날부터 엄마 젖은 동생 차지가 되었다.
둘째가 태어난 날부터, 분유도 아니고 서울우유를 넣어 놓은 흰 우유병을 큰아들의 자는 머리맡에 서너 통씩 세워 놓았다. 큰아들은 서울우유 먹고 비교적 훤칠하게 잘 자랐다.
본사는 부도나고 대리점이 문을 닫고, 임대 보증금에서 다달이 임대료만 빠져나갔다. 그렇게 이삼십 대 부부는 무일푼이 되었다. 남편은 며칠을 두문불출했다. 산바라지도 못해 주고 잠깐씩 딸네 집에 들러 미역국만 끓여놓고 가시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준수 애비, 잠은 잘 자지? 저러고 잠만 자고 있다고 뭐라 할 것 없다. 살아 있으면 다 괜찮다. 다 좋아질 거야. 술 먹고 괴로워하느니 차라리 잠이라도 자는 게 백번 낫지. 암, 낫고 말고~가만 내버려두어라."
방 한 구석에 누워있는 사위의 등 뒤에서, 친정어머니는 십자고상을 바라보며 기도를 드렸다. 남편은 태생적으로 술이 받질 않는다. 잘못 과음이라도 할 경우, 정말 위험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매일 누워만 있던 남편이, 계량기 검침원 일자리를 얻어서 외출을 시작했다. IMF로 실직한 사람들을 위해, 국가에서 시행한 공공근로사업이었다. 한 겨울이었다. 거위털 잠바 하나도 없어서, 이마트에서 산 누런색 오리털 잠바를 입고 남편이 아침마다 집을 나섰다.
(2021년 9월 24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