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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Nov 03. 2022

(소설) 아담과 애플 30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는 청진고등학교에도 3월의 봄바람은 여전히 쌀쌀맞았다. 무릎 위로 짧게 올려 입은 교복 스커트 아래로 여학생들의 늘씬한 다리가 운동장 옆으로 여럿 지나다녔다. 말루스 창가에 은정이 혼자 앉아있는 걸 발견한 신재희가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를 내며 다가와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사랑에 빠진 여자가 여기 있군요. 은정씨 표정을 보아하니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간 것 같은데, 맞아요? 후훗, 우리가 같은 남자를 놓고 경쟁하는 사이가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은정씨 지금 너무 섹시하게 예뻐서, 내가 잠깐 겁먹었나 봐요. 호호호~"


은정의 귀에 신재희의 찰랑거리는 너스레가 오히려 친근하게 들려왔다.


"맘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일단 자고 봐야 해요. 두 사람이 어디까지 진도를 뺐는지는 모르겠지만, 순수한 척 시간 끄는 건 멍청한 여자들이거나 못난 여자들이나 하는 짓이에요. 그들에겐 '아름다움'이나 '섹시함'등의 무기가 없거든요.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순수하고 고결한 척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결국 그녀들이 원하는 것도 단 하나, 남자와의 잠자리거든요. 어떻게 해서든지 고지에 도달해야만 하는 건, 남자나 여자나 다 똑같아요. 아닌 척해봐야 본인 손해일뿐이라는 거죠."


신재희의 논리는 틀리지 않았다. 은정이 성훈에게 가지고 있던 불안감이나 의문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던 것도 결국 성훈과 섹스를 나누고 나서였기 때문이다. '연인'이라는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섹스에 찬성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가 몇 년, 아니 몇 달 동안 지속될 수 있을지는 누구도 모르기에, 사람들은 '결혼'이란 장치로 서로의 몸과 시간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충고하는데, 남자는 절대 가지려 들지 말아요. 차라리 그의 돈을 나누어달라고 하는 편이 좋을 거예요. 남자에게서 여자가 가질 수 있는 건 그 순간의 섹스, 그리고 돈 뿐이라는 거 명심해요~ 와이프 자리 그런 거에 목숨 걸지 말라는 뜻이에요. 더군다나 황태자는 그런 데 목숨 거는 여자는 금방 지루해할 거예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은정씨가 '사랑'에서 살아남는 길은 그 남자를 소유하려 들지 않는 태도예요. 그냥 마음껏 사랑만 하면서 사랑의 시간을 즐겨요~"


가끔 신재희의 언어들은, 언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에 한 줄기 빛처럼 내려와서 땅 속으로 깊이 스며든 뒤에 한 송이의 꽃을 피워 올리는 것처럼 평화롭고 화사할 때가 있다. 재희는 마치 은정의 복잡한 마음속을 스캔이라도 하는 것처럼 예리하게 짚어내었다. 그녀가 왜 주민국의 공공연하게 숨겨진 여자로 살면서도 누구보다 즐겁고 평안해 보이는 건지 은정은 알 것도 같았다.


"사랑은 하되 욕망하지는 말라는 뜻인가요?"


은정의 물음에 신재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대꾸했다.


"역시 예쁜 여자가 똑똑하다는 말이 진짜네요~"


하지만 그건 매우 어려운 경지다. "사랑은 하되 욕망하지는 말라. 차리리 돈을 나누어달라고 하는 게 탐욕스럽지 않다"는 신재희의 논리가 은정의 머릿속에서 기도문처럼 둥둥 떠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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