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는 청진고등학교에도 3월의 봄바람은 여전히 쌀쌀맞았다. 무릎 위로 짧게 올려 입은 교복 스커트 아래로 여학생들의 늘씬한 다리가 운동장 옆으로 여럿 지나다녔다. 말루스 창가에 은정이 혼자 앉아있는 걸 발견한 신재희가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를 내며 다가와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사랑에 빠진 여자가 여기 있군요. 은정씨 표정을 보아하니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간 것 같은데, 맞아요? 후훗, 우리가 같은 남자를 놓고 경쟁하는 사이가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은정씨 지금 너무 섹시하게 예뻐서, 내가 잠깐 겁먹었나 봐요. 호호호~"
은정의 귀에 신재희의 찰랑거리는 너스레가 오히려 친근하게 들려왔다.
"맘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일단 자고 봐야 해요. 두 사람이 어디까지 진도를 뺐는지는 모르겠지만, 순수한 척 시간 끄는 건 멍청한 여자들이거나 못난 여자들이나 하는 짓이에요. 그들에겐 '아름다움'이나 '섹시함'등의 무기가 없거든요.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순수하고 고결한 척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결국 그녀들이 원하는 것도 단 하나, 남자와의 잠자리거든요. 어떻게 해서든지 고지에 도달해야만 하는 건, 남자나 여자나 다 똑같아요. 아닌 척해봐야 본인 손해일뿐이라는 거죠."
신재희의 논리는 틀리지 않았다. 은정이 성훈에게 가지고 있던 불안감이나 의문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던 것도 결국 성훈과 섹스를 나누고 나서였기 때문이다. '연인'이라는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섹스에 찬성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가 몇 년, 아니 몇 달 동안 지속될 수 있을지는 누구도 모르기에, 사람들은 '결혼'이란 장치로 서로의 몸과 시간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충고하는데, 남자는 절대 가지려 들지 말아요. 차라리 그의 돈을 나누어달라고 하는 편이 좋을 거예요. 남자에게서 여자가 가질 수 있는 건 그 순간의 섹스, 그리고 돈 뿐이라는 거 명심해요~ 와이프 자리 그런 거에 목숨 걸지 말라는 뜻이에요. 더군다나 황태자는 그런 데 목숨 거는 여자는 금방 지루해할 거예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은정씨가 '사랑'에서 살아남는 길은 그 남자를 소유하려 들지 않는 태도예요. 그냥 마음껏 사랑만 하면서 사랑의 시간을 즐겨요~"
가끔 신재희의 언어들은, 언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에 한 줄기 빛처럼 내려와서 땅 속으로 깊이 스며든 뒤에 한 송이의 꽃을 피워 올리는 것처럼 평화롭고 화사할 때가 있다. 재희는 마치 은정의 복잡한 마음속을 스캔이라도 하는 것처럼 예리하게 짚어내었다. 그녀가 왜 주민국의 공공연하게 숨겨진 여자로 살면서도 누구보다 즐겁고 평안해 보이는 건지 은정은 알 것도 같았다.
"사랑은 하되 욕망하지는 말라는 뜻인가요?"
은정의 물음에 신재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대꾸했다.
"역시 예쁜 여자가 똑똑하다는 말이 진짜네요~"
하지만 그건 매우 어려운 경지다. "사랑은 하되 욕망하지는 말라. 차리리 돈을 나누어달라고 하는 게 탐욕스럽지 않다"는 신재희의 논리가 은정의 머릿속에서 기도문처럼 둥둥 떠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