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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Nov 04. 2022

(소설) 아담과 애플 31

봄날의 저녁이 청진빌딩에 어둠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얼마 전만 해도 은정은 성훈이 그녀를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에 급급하여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했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이 그녀에게 밀착되어 있음을 확인한 지금에는, 그들의 운명이 결혼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과 의문에 또다시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신재희를 주민국에게 기생하여 살고 있는 주민국의 여자쯤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재희를 향하는 은정의 시선은 이제 달랐다. 자신의 삶을 완벽하게 살아가고 있는 지혜로운 여자로 보이는 신재희의 말들이 다 맞는 것 같다가도, 은정의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또 다른 생각들을 막을 길이 없었다. 한 사람에게 깊이 다가갈수록 도리어 그녀 안의 공허가 점점 커져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 공허는 재희의 말대로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의 전부를 가지려 하는 건 실상은 폭력에 가깝다. 결혼은 상대의 전부를 혼자서 독차지하겠다는 이기심과 다를 바 없다. 서로를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것에 대한 승인이 결혼제도일 수도 있다. 그래서 재희는 그가 가진 많은 것들 중에 차라리 돈을 나누어달라고 하는 게 탐욕스럽지 않다고 했던 것인가 보다.'


아무리 곱씹어 생각해보아도, 이미 은정의 사유는 한 사람을 온전히 소유하려는 욕망의 틀 안에 갇혀서 빠져나갈 다른 통로가 없어 보였다.


"사랑은 하되 욕망하지 말라~ 사랑은 하되 욕망하지 말라~"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날뛰는 마음을 붙잡으려고 은정이 꾸에로 공방을 서성이며 속엣말로 반복해서 중얼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의 음성이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선생님, 무슨 일 있으세요? 이렇게 박음질하면 되는 거죠?"  

공방의 직원이었다.


어느덧 봄이 찾아왔는데, 1층 아귀찜 <고여사네>의 고주연은 한숨이 길었다. 옆 가게 <해누리>의 강서준과 몇 달 전에 드디어 모텔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었다. 지난여름 주연이 아침마다 드립해서 서준에게 대령한 아이스커피의 정성이 결실을 맺었던 건 초겨울의 늦은 저녁이었다.


꽉 끼는 청바지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서준의 애플힙 뒤태는 나무랄 데가 없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의 남성은 그리 쓸모 있지를 못했다. 거의 일 년 만에 가진 남자와의 잠자리였는데, 주연은 실망감만 잔뜩 안고 두 시간 뒤 모텔을 나서야 했다.


이후로 서준과 주연은 반대가 되었다. 그렇게 독야청청할 것 같던 강서준이 이제 주연에게 몸이 달았다. 오십 대의 늙은 여자가 뭐 대수겠느냐 넘겨짚었던 것은 서준의 큰 오산이었다. 한 여름내 아이스커피로 유혹했던 주연의 몸은 학교 선생을 하는 와이프의 몸과는 천양지차였다.


그동안 몇 번의 사업 실패로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서준은, 다른 여자와의 섹스를 하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 아내에게 의무를 다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주연이 서준에게 보여준 세계는 별천지였다.


자꾸만 치근거리는 강서준을 그의 가게로 등 떠밀어 내보내고 앉아 있을 때, 고여사네 앞으로 느긋한 한복 차림을 한 박태성이 지나갔다.


'내가 누구 마누라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박태성은 싱글이니 차라리 저이가 훨씬 낫지.. 애플힙, 그딴 게 뭐라고? 밖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지. 아무렴~ 저이는 요즘 누구랑 연애를 하고 있을까?'


고주연은 오후 세시의 한가로움 속에 앉아서, 6층 신재희의 얼굴부터 2층 진현주의 얼굴까지 차근차근 떠올려보았다. 주연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채, 그 얼굴들 가운데 4층 꾸에로 공방의 이은정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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