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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Nov 12. 2022

존재의 소리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생명의 소리는 고사하고 존재의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주로 사회적 페르소나를 많이 가지고 있거나, 자신을 스스로 만든 높은 성벽 속에 모셔놓고 세상을 내려다보는 행세를 하는 그런 류의 사람들에게서 나는 존재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던 것도 같다. 타인을 무시하거나 짓밟는 소리를, 나는 존재의 소리로 치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본연의 존재의 소리에 처음 눈 뜨게 된 것은, 십여 년 전 한창 남편과 피 터지게 싸우던 시기로 기억한다. 나를 향한 남편의 원망과 분노의 눈빛을 읽으며, 그때 난 처음으로 내가 남편에게 행했던 모든 잘못을 순식간에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타자라는 존재를 본래의 그 자체로서 바라보고 이해하는 법을 터득했다고 하면 너무 지나치게 나간 것일까?


이전까지는 내가 중심이 되어 상대의 소리를 해석했다면, 그 순간부터 내 생각과 감정을 섞지 않고 순결하게 상대의 소리를 원래대로 듣는 법을 깨우칠 수 있었던 것 같아서 해본 말이니 독자님들은 이 부분에 관하여 너무 괘념치 마시기를 바란다. 이후로 내 딴에는 타자라는 존재들의 소리를 오리지널 사운드 그대로 듣고 파악하는 능력을 하나 얻게 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런 능력은 어벤저스팀의 능력도 아니고 자본가의 능력도 아니므로 자랑거리는커녕 쓸모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이번엔 영어과 교원자격증 가지고 중학교로 영어 강사를 나갔다. 코로나로 교사 인력이 부족한 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선생이 병이라도 나면, 학교는 그야말로 교사 확보에 전력투구할 정도라고 한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대지가 앞다투어 꽃을 피우듯이, 중학생들은 주로 교실과 복도에서 저마다의 꽃을 피우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어릴 적의 나는 선생님들의 세계에 일종의 호기심이 없던 것도 아니었는데, 요즘의 나는 어느 곳에 강의를 나가든 교사들의 세계는 그리 궁금하지가 않게 되어버렸다. 내게 필요한 업무적인 정보만 전달받는 것으로서 충분할 뿐, 더 이상 그들의 세계에 다가서고 싶은 호기심이 하나도 일어나지가 않는다.


하지만 학교라는 곳에는 나의 호기심과 전혀 무관한 교사들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저층으로 지어진 학교 건물들 앞에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아도 늘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게 느껴지는 운동장이 펼쳐져있고, 그 옆에 서있는 의젓한 나무들은 가을의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갈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시끌벅적한 교정에 들어설 때마다 나의 영혼은 언제나 신록의 푸른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곤 하였다. 곧 터져버릴 듯이 부풀어 오른 풍선의 그 아찔한 절정을 교정에서 느끼곤 한다고 말한다면 혹자는 나를 성범죄자로 오인하여 교육청에 신고할지도 모르겠지만, 단언컨대 이런 충만한 기쁨은 성적 환타지와는 전혀 다른 영역의 것이다.


감탄스러울 만큼 신비한 생명의 꽃들이 여기저기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꽃밭에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꽃들은 있기 마련이다. 뛰어나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들이 그런가 하면, 그 옆에선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피 흘리는 꽃들도 있었다. 부잡스럽고 통제가 어려우며 타인에게 방해가 되는 아이들은 대부분 그 거친 언어와 행동 속에 처절한 삶의 고통을 이미 내포한 아이들이다.


나이가 드는 것의 이로움 가운데 하나는, 어느 곳에 가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점이다. 며칠간의 수업 일정을 마치고 교무부장 친구와 인사를 나누며 돌아서는 길에, 나는 한참을 주제넘게도 한 아이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배 고픈 이에겐 따뜻한 밥 한 끼를, 사랑에 굶주린 아이에겐 따뜻한 보살핌과 위로를 주는 것 우리의 존재 이유다. 지구를 구하고 환경을 살리는 길은, 생명을 가진 하나의 인간 존재를 먼저 살리고 그에게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의 의미를 알려주는 것에서 출발한다.


어차피 우리는 똑같이 한 세상을 견디며 살다가 무로 돌아간다. 존재마다 소멸의 고지를 정복해야 한다면, 삶이 있는 동안 타자에게 오직 사랑을 주는 일만이 우리의 해야 할 일이 아닐까. 나는 이상하게도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의 소리가 듣기에 참 좋았다. 다시 그 소리가 그리워지는 걸 보니 내가 많이 늙긴 늙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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