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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Nov 18. 2022

공주행 티켓

"00님, 내일 오시면 숙소는 어떻게 할까요? 지난번 검색해두었던 한옥호텔 좋은 거 같던데요, 저랑 함께 자고 가는 건 어떠세요?"


그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침착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휴대폰 저 너머에서 그녀의 온화한 얼굴이 그려졌다. 


"지금 생각엔 내일 마지막 버스를 타고 오려고 요. 일단 내일 가는 차편만 티켓팅해두었으니, 제가 마트에서 장 보고 집에 가서 조사 좀 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청주에서 공주행 시외버스는 어플에서 예매가 불가능했다. 세종시와 인접해있는 공주는 아주 오래전 백제의 두 번째 수도(웅진성)이기도 했었는데, 여전히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기엔 불편한 부분이 남아있는 곳이다. 개발과 전통(유적)은 늘 그렇게 상반된 얼굴을 하고 있을 때가 많다.


휴대폰으로 예매가 불가능하자, 나는 기어이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직접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집에서 가깝기도 하거니와 마트와도 지척이라서 겸사하여 티켓 창구로 가서 여직원에게 직접 문의했다. 시간과 좌석이 지정되는 티켓이 아니라서, 어플 예매가 안 되는 것이라고 그녀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티켓을 가지고 있으면 날짜와 시간 무관하게 공주행 버스를 탈 수 있다고도 했다.


아~, 이 재미난 설명을 듣기 위해 내가 직접 터미널 창구까지 왔나 보다. 티켓만 가지고 있으면 아무 날이나 어느 시간이고 상관없이 공주행 버스에 오를 수 있다니, 마치 해리포터에 나오는 기차 플랫폼 3/4 구역(9와 3/4역이었나?)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해리포터에선 마법학교로 통하는 티켓은 기차역에서 따로 구매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도 확언하지 않으련다. 


우리는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맞추어 어떤 일들을 행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다. 날짜와 시간에 제약 없이 내 마음이 요동칠 때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횡재인가.


나는 저 티켓을 내일 당장 쓰지 않고 있다가, 첫눈이 내리는 날 무작정 공주행 버스에 올라타도 된다. 약속한 사람은 없지만 첫눈이 내리는 날, 공산성을 혼자 걸어도 마냥 좋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누가 아는가. 첫눈을 맞으며 혼자서 쓸쓸히 공산성을 거닐고 있노라면, 나같이 훌쩍 다른 도시로 떠나온 길 위의 영혼을 만나게 될지 말이다. 후훗~ 내가 제법 나이가 많지만, 러브스토리는 늘 상상만으로도 재밌는 것을 어찌하랴.. 


내일 오후 공주에 가면 함께 만날 친구들이 있다. 그들은 언제나 내 잠자리부터 묻곤 한다. 아, 물론 우리는 레즈비언들은 아니다. 우리가 남은 인생에서 좋은 친구들과 함께 보낼 수 있는 밤이 과연 며칠이나 되겠는가. 비록 하룻밤이지만 좋은 친구와 밤 시간을 길게 보내고 싶은 마음은 내게도 굴뚝같다.


하지만 다음날 일요일 아침부터 취업준비로 자격증 시험을 보러 가는 작은아들이 마음에 걸려서, 나는 그녀에게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견우직녀도 아닌데, 그녀와 하룻밤조차 함께 보내지 못하는 내 심정이 왠지 애가 닳는다.


우리의 생의 날들이 아직 저만큼 멀리까지 남아있는 것도 같은데, 자꾸만 친구들에게 주지 못하는 내 시간이 미안하고 속상하다. 남편과 자식 놈들에게 쏟아부은 그 숱한 날들에 비한다면, 친구들에게 쏟은 시간은 상대적으로 극히 빈약했다. 장을 보고 부리나케 집에 돌아와서 작은아들과 저녁밥을 먹다가 문득 그런 생각에 미치자, 공연히 인생이 쓸쓸하게 여겨졌다.


남편도 자식도 다 타자의 신체라는 점에서 부모와 친구와 다를 바도 없는데, 나는 내 인생의 모든 날들을 남편과 자식 놈들에게 쓰고 살았던 것 같다. 거기에 간간이 부모님이 계시고 언니들이 있었다.


이제 곧 겨울이 오고 첫눈이 내릴 것이다. 이 나이에 이혼도 못한 여자가 청승맞게 공산성을 혼자 걷겠는가. 내일은 오늘 끊어두었던 버스표로 공주에 갈 테지만, 첫눈이 오는 날엔 무작정 터미널로 가서 공주행 티켓을 구매할지도 모르겠다. 나의 아름다운 친구들을 그리워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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