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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Nov 22. 2022

시장 구경

낮부터 비가 내리고 음악은 흐르지 않는 저녁이다. 가족들이 먹고 지나간 저녁 식탁에서, 남은 찬거리에 나 혼자 막걸리 한 잔을 곁들여 저녁을 먹는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에는, 걸리적거리는 가족 없이 혼자 먹는 게 편할 때도 있다.


3교대하는 큰아들과 취업준비 중인 대학생 아들이, 여전히 엄마가 차리는 식탁에 중딩들마냥 모여 앉아 검은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아빠와 밥을 먹었다. 아직은 저희들 부모가 크게 아픈 적이 없어서 이제껏 철부지 같은 자식 놈들이지만, 녀석들이 모두 집안에 들어와 있으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화롭다.


남편은 저녁밥을 먹자마자 우산을 하나 들고 동네 형과 늦은 산책을 나가고, 이미 오래전에 성인이 된 자식 놈들은  밥만 먹고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늙어가는 는 혼자서 남은 반찬에 밥을 한 술 뜬다. 엄밀히 말하면, 한 술 아니고 한 그릇이다.


지난주에 위에서 용종을 제거하는 시술을 받았던 어머니를 모시고 충북대병원엘 다녀왔다. 나한테 감기 기운이 있어서 부모님 모시고 점심식사를 하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부모님은 막내딸이 당신들 건강을 염려하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독감 예방접종을 하셔서 상관없다고 말씀하셨다. 


부모님은 육거리시장 안에서 순대국밥이 드시고 싶다 하셨다. 더 좋은 순대국밥집도 있으련만, 당신들이 시장을 보다가 들르곤 하셨던 국밥이 입맛에 맞으셨던가 보다. 나는 마스크를 꼭 쓴 채로 어머니를 부축하며 따라갔다.


동네 의원에서 위에 무슨 혹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나서부터, 어머니는 두어 달 동안 제대로 식사를 챙겨 드시지 못하셨다. 겁도 나고 소화도 안돼서 겨우 조금씩 요기를 하셨을 것이다.


그러던 어머니가, 이제부턴 드시고 싶은 거 마음대로 드셔도 된다는 대학병원 의사의 허락을 오늘 받으시더니, 국밥 한 그릇을 막내딸만큼이나 거의 다 잡수셨다. 병원에선 휠체어로 이동해야만 했던 어머니의 발걸음에도 조금씩 힘이 붙기 시작했다.


구순이 코앞인 꼬부랑 어머니도 모처럼 나온 시장 구경이 마냥 좋으셨던가 보다. 품바 공연을 하는 어느 놀이패의 공연을 보시며 기운을 차린 어머니가 박수까지 치셨다. 맞은편에서 낯이 익은 눈동자와 우연히 마주쳤는데, 몇 해 전만 해도 아주 가끔 술잔나누었던 극단 대표였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부모님을 세워놓고 달려가 덥석 그의 손을 잡았다.


한 두 번 술을 먹은 인연도 큰 인연인데, 공부를 핑계로 술자리 인연들의 전화번호를 깡그리 없앤 적이 있었던 터라 그의 연락처가 내겐 없었다.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극단 대표를 우연히 시장에서 만났노라 얘기하다가, 여전히 쫌스러운 내가 구차한 말을 속없이 던지고야 말았다.


"아이고, 내가 그 사람을 먼저 아는 체하지 말 걸 그랬나 봐요. 걱정되고 궁금하긴 해도, 없이 사는 사람을 또 보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지 않수.."


그래도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가 덥석 손을 마주 잡은 것은, 그들 극단과 내가 한 건물에서 똑같이 월세를 내던 시절이 있기 때문이었다. 동고동락쯤은 아니어도 힘든 시절을 함께 한 피난민 같은 동지애 비슷한 것이 여전히 내 마음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병원 시술하기 전에 이미 대충 김장을 담그셨던 어머니가 배춧국을 끓여 드시겠다고 배추 두 포기를 고르시는데, 배추 파는 아주머니가 심청이 같은 딸을 두셨다고 말해도 귀가 어두우신 부모님은 알아듣지 못하셨다. 육거리시장을 아무리 다녀봐도 우리 어머니같이 늙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 요양원에 누워계셔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노인을 모시고 시장통을 누비고 다니는 것이, 상인들의 눈에 예사로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겐 효녀 심청이로 보였을지라도(실상은 결코 나는 효녀가 아니다. 다만 어찌할 수없이 상황에 순응할 뿐이다), 나는 그 시장통에서 만난 옛 지인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한 것을 후회하기도 하는 비겁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가 나에게 무엇을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지레 겁을 먹고 자본주의식 계산기를 두드려대고 있으니, 나는 세월을 거짓으로 먹고살았나 보다.


오랜만에 시장 구경을 나온 어머니가 흡족한 표정을 지으시며 막내딸이 운전하는 차에 올라탔다. 위아래 틀니를 낀 어머니의 입에선 가만히 있어도 작은 구슬들이 연약하게 부딪히며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께서 더디고 힘없는 발걸음일망정 꾸역꾸역 옮기시며 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실 수 있는 날들이 앞으로 몇 번이나 될까 생각하며, 나는 늙은 부모님을 조현병 두 딸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모셔다 드렸다.


부모님이 집에 들어가시자, 때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환한 얼굴과 오래전 지인을 우연히 보게 된 날, 오늘 하루의 기쁨과 감사가 적당히 알맞은 때에 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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