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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Nov 28. 2022

일편단심

언제부터 비가 왔는지 모르겠다. 아파트에 살고 있으면 이런 것이 조금 곤란할 때가 있다. 음식물 쓰레기라도 버리러 내려가지 않고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 날이, 아파트 창 밖으로 가늘게 내리는 빗방울 정도는 막상 가늠이 되질 않는다.


오늘은 딱히 외출할 일이 없었다. 업무량이 많지 않은 사무실 일도 집에서 노트북으로 처리가 가능한 데다, 강의를 하러 가거나 마트에 가야 할 일이 없는 날에는 구태여 바깥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 어제부터 휴대폰으로 봤던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의 신부>를 오전에 완주하고, 엄밀히 따지자면 내 일도 아닌 동문회 임원단의 일을 대신하느라 오후 시간을 속절없이 흘려보냈다.


천 원 한 장 쓰는 거에도 매우 민감한 나는 대체로 돈 쓰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집에서 셀프 염색을 하는 것도 미용실 방문이 귀찮기도 하거니와 돈이 아까워서다. 쇼핑하고 미용실 가는 시간과 돈처럼 아까운 게 없을 정도이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안목을 중시하고 내가 인생에서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아름다움' 이기도 한데, 정작 나는 여성으로서 나를 가꾸는 것에는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나는 그렇게 조금 초라하게 늙어가는 중이다.


비슷하게 늙어가는 또래의 여자들이 부지런히 제 몸들을 가꾸며 제아무리 빼어난 미모를 자랑질해도 단 한 번도 꿀려본 적 없는 나지만, 역시 젊음 앞에선 맥없이 허물어지고 마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세월 이기는 장사는 어디에도 없다.


인생에서 자존심 부릴 일이 어디 여자의 미모뿐이겠는가. 급여받고 일하는 것도 아닌데도, 나는 언제나 돈 안 되는 일에서 늘 최선의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돈 받고 일할 땐 더 열심히, 돈 안 받고 일할 땐 그래서 더 열심히 일을 한다. 그건 어쩌면 내가 여자로서 부리는 자존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나는 다른 사람의 해야 할 일을 대신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뒤에서 일을 완수했다. 동문회에서 보내는 모바일 초대장을 만들 때였다. 그쪽 회사도 땅 파서 장사하는 게 아닌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일단 연습 삼아 무료 제작 버튼을 눌러보았는데, 어라~뭐가 제대로 되어가는 게 아닌가.


돈 한 푼 안 들이고도 순전히 정성과 시간만 들이면 초대장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서 더 열심히 만들었다. 충북대 사이트 접속해서 캠퍼스 사진 다운로드 요청을 하고, 승인을 받기 위해 직원들과 몇 차례 통화까지 했다. 나는 어떠한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늘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즐거움을 크게 갖는 편이다.


하지만  파서 장사하는 장사꾼 없듯이, 세상에 공짜로 무엇을 얻는다는 게 어디 쉽겠는가. 중간쯤 만들다가 다시 막히고 화면이 처음으로 되돌아가기를 두세 번 반복하다가, 끝내 오기가 발동해서 5천 원을 쓰려고 했던 첫 마음마저 거두어들이게 되었다. 나는 기어이 '무료 제작'에 성공해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해냈다.


하늘이 내게 일머리의 재능을 주셨으니 타고난 소임을 말없이 행할 뿐이지만, 나는 가끔 슬며시 억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척, 못하는 척하는 무능 컨셉이 인생 살기에 한결 수월할 수도 있기에 그러하다. 나도 오래전에는 무능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쩌다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


왜 그렇게 동문회 일에 열심인 거냐고 누군가 물었다. 아마도 그것은 '애정'때문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를 흠모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를 위해 내 정성과 시간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내가 동문회에 가지고 있는 마음이 딱 그러하니, 그저 일편단심으로 향하는 이 마음을 나인들 어찌하겠는가.


젊어서 한 사람을 향하여 뜨겁게 가져보지 못한 마음을, 세월 따라 늙어가며 십수 년째 동문회에 쏟아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두워진 창 밖으로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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