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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Dec 07. 2022

동문회 준비 일지 1

내 우아한 술 역사의 시작

"나 몰라유? 나 OOO이요, OOO~테레비에서 봤을 텐데"

선배 A는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 특히나 식당 종업원 아주머니들 앞에서 늘 그런 식이었다. 그와 동행하여 어디 낮술이라도 먹으러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갈 때면, 그와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내가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게 만들곤 했었다. 하지만 '참 그것도 재주였구나~'하는 생각이 요즘 동문 송년회를 준비하며 새삼스럽게 들고 있다.


선배 A와 내가 처음 만난 건 십사 년 전쯤이었던 것도 같다. 학창 시절엔 선배는커녕 동기들과도 어울려 지내는 법을 하나도 알지 못했던 터라, 프리랜서로 도청의 모 기관 잡지를 맡아서 발행해주는 일을 하고 있을 때 "같은 언론인"이라는 자격으로 그를 우연히 알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로의 소개를 하다 보니 대학 얘기가 나왔을 테고, 그러다 같은 학과 출신의 선후배 사이라는 게 들통이 나버렸을 것이다. 그것이 내 인생에서 "우아한 술"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첫 장면이다.


그는 술을 좋아하기도 하였거니와 자주 마시기도 하였다. 기자들의 업무가 주로 관공서를 드나들며 취재를 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거래처 직원들과 식사 자리는 늘상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익숙해진 식사 자리의 습관은 어느새 그의 인격과 정신세계 구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였다. 소주 한 잔에도 정신이 혼미해지는 남편과 살다가 술 서너 병에도 끄떡없는 대인배를 만났으니, 선배 A는 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나의 호기심을 부추기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삼십 대의 끝자락과 사십 대의 초반에 그와 함께 술을 먹었다. 아마도 그가 대학 선배라서 가능했던 "믿고 먹는 술자리"가 아니었던가 싶기도 하다. 돌이켜보니 참 좋은 시절이었다.  밤늦도록 마시고도, 다음 날 새벽에 다른 도시로 취재를 갈 수 있을 만큼 그때는 젊기도 했었으니 말이다.


어느 날 그가 우리 지역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의 식사 자리에 나를 초대하였다. 한국은행 본부장, 모 회사 CEO, 경찰대 출신 최연소 경정, 인터넷 신문 CEO 등이 그 자리에 동석한 인물들의 면면이었다. 그 자리에서 서로 명함들을 주고받으며 잘 먹고 헤어진 다음 날, 내 이메일로 그들의 러브콜이 일제히 쏟아졌다. 두 사람은 직원으로 스카웃 제안을 주었고, 다른 두 사람은 격식 있는 순수한 친구 제안을 정중하게 장문의 문장으로 보내왔다. 한마디로 이런 걸 올킬이라고 한다. 결국 지금까지 연결되고 있는 건 순수한 친구 제안을 주었던 두 사람뿐이지만, 한 회사 CEO와는 결국 훗날에 하나의 프로젝트를 함께 실행한 적은 있었다.


자연의 일부로서 태어나고 늙어가고 있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술자리에서 비즈니스의 목적만으로 어울리진 않는다. 여성과 남성이 함께 어울려 식사와 술을 곁들이는 자리에선, 어느 정도 서로가 서로를 맞춰주는 의미에서 술잔을 따라주기도 한다. 여성이 남성에게 일방적으로 술을 따른다는 의미가 아니지만, '미투'에 비추어 본다면 술을 따르는 여성의 마음가짐이 어떠했느냐에 따라 충분히 문제의 소지가 있는 부분도 존재했을 것이다.


요즘 젊은 애들은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겠으나, 우리 나이 때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회생활을 했던 커리어 우먼들이라면 대략 고개를 끄덕끄덕할 수도 있다. 그 당시 우리들 시절엔 어느 조직에서나 그런 술자리들이 예외가 없었다. 다만 그 자리에서 내가 어떤 포지션을 점하고 행동하느냐는 온전히 여성의 내면의 힘과 의지의 발현에 달려 있기도 했었다.


비즈니스 목적으로 만났다가도 서로 소통이 될만하면 인간으로서 좋은 지인 정도의 관계는 유지하며 지내기도 한다. 세상만사 한 순간도 빠짐없이 다 정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아. 정치적이고 싶지 않아서 집에만 있어." 하지만 집에만 있는다고 정치적이지 않다고 하는 말에는 지 않은 허점이 있다. 부부관계만큼 가장 정치적 논리로 계산하는 관계는 없다. 그는 '정치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비즈니스로 만난 술자리에서의 만남이 간혹 여성과 남성의 은밀한 관계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나는 구태여 그런 귀찮은 일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 나의 '우아한 술'의 역사에서 나는 한 번도 타인에 의해 술잔을 비우거나 술을 따라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너에게 술을 따라주고 싶어서 한잔 따라주는 것일 뿐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선배 A와의 인연으로 나는 대학 동문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문회에서 새로운 술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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