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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Dec 20. 2022

동문회 준비 일지 2

깊이 없는 만남에도 사랑은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일은 어떤 '존재'를 만나서 관계를 맺는 일이다. 그 어떤 '존재'라고 할 때 우리의 머릿속에는 의당 '이성'이거나 '사람'이 떠오르기가 쉽겠지만, 어떤 때는 나와 관계를 맺는 그 '존재'가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


그 '존재'는 때로 초목이 울창한 자연이거나, 마치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는 듯이 눈을 껌벅거리며 내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 한 마리의 개의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날 수도 있다. 그 존재가 무엇이든 간에 내 마음을 활짝 열고 대상을 깊게 들여다볼 때, 우리의 전두엽에선 대상으로부터 '깊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신비로운 작용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만남들 가운데, 가장 신비롭고 아름다운 관계 맺기는 역시나 '이성(異性)'과의 만남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 중에 식욕과 수면욕구는 내 하나의 신체 만으로 해결이 가능한 영역이지만, 일명 '성욕'이라 불리는 애정에 대한 욕망은 내 하나의 신체만으로 해결이 가능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애정에 대한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선 정신을 소유한 타인의 신체가 필요하다는 점이, 식욕 및 수면의 욕구와 분리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말에도 반박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도구를 사용하는 인구수보다 도구를 구매하는 법을 모르거나 구매 의사가 없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데이터를 나는 조심스럽게 신뢰하는 편이다. 결국 이 말은 가상현실이 발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으로부터 진실한 사랑을 받기를 원하고 있고 그 역시 타인을 깊게 사랑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유한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가 지구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신비는 타자(인간, 자연, 동물 등)와 관계 맺기라는 설정에서부터 시작된 나의 논리가 어쩌다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 사용 인구수의 데이터 측정값까지 비약했는지는 아리송하지만, 어찌 됐든 타자와 깊은 만남을 갖는 것은 분명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논리가 어느 조직 혹은 어느 모임에서나 다 같은 비중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개인의 사회적 성공과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 없다고 판단되는 동문회에서, 타자와의 신비로운 만남이나 깊은 관계 맺기 같은 것을 기대하고 오는 동문은 거의 없다.


이십 대 청춘 시절에 만났던 첫사랑과의 합법적인 재회 정도를 기대하거나, 그나마 동문이라는 이름으로 편하게 소주 한잔 나눌 수 있는 마음가짐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아름다운 자세일 수밖에 없는 게 대학 동문회의 현실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명문대 동문회에는 무슨 비밀 결사조직 같은 것이 있다고도 하지만, 우리 한국 사회에서 대학 동문회라는 것은 길어야 반세기에 불과한 처지이고 보니 사실상 그들과 비교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대학 설립의 역사적 배경과 장구한 세월 값에 차이가 있기에 그러하다.


우리 대학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80학번에서 시작된 우리 영문학과의 선배님들이 대학 졸업 후 각자의 일터에서 열심히 삶을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동문회라는 것을 만든 지가 어언 삼십 년이 넘었다. 1대 동문회장이었던 80학번 선배님은 지금도 가장 먼저 동문회에 출석하고 계시지만, 91학번 이후 후배들은 오히려 찾아보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91학번 이후 후배들의 모습이 동문회에 보이지 않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진상 같은 선배에 대한 나쁜 기억이라든가 혹은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자신만의 흑역사가 있다든가 해서 그들이 동문회에 나오지 않는 지도 모른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모 방송사 선배 A와의 인연으로 시작된 나의 동문회 출정기에선 초반부터 여태껏 별다른 사건은 없었다. 대학 시절 선배들로부터 얻어먹어본 적 없는 술을 이따금 얻어 마셨다는 것과, 가끔 먼 나라에서 날라 온 외국인처럼 아주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 여성 동문들의 묘연한 행방을 아직도 추적 중이라는 것, 그 정도뿐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동문회를 보니, 재학생 후배들을 제외하곤 여성 동문이 나 혼자일 때가 많았다는 사실의 기록이 조금 특이점이라고나 할까, 뭐 그 정도뿐이었다.


그런데 동문회를 겪으며 내게 이상한 특이점이 한 가지가 더 있었다는 것을, 나는 최근에야 깨닫게 되었다. 여럿이 만나서 우왕좌왕 시끌벅적하게 서로의 생사 정도만 확인하고 돌아서야만 했던 짧은 만남들의 시간에 세월이 입혀지면서, 나는 한 사람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도 같은 깊은 애정을 동문회에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상을 깊게 들여다볼 때 비로소 생겨나는 줄로만 알았던 사랑이, 잠깐씩 드물게 가졌던 동문회에서 생겨날 줄은 나 역시 미처 알지 못했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 대상과의 깊은 관계에서만 오는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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