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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Dec 22. 2022

동문회 준비 일지 3

새로운 TFT

비밀결사단 같은 것도 아니요 그런 은밀한 목적 따위 있는 것도 아니지만, 구태여 여러 동문들에게 떠벌리지 않고 조용히 내가 동문회를 기반으로 현재 핸들링하고 있는 사조직은 두 개가 있다. 그 두 개의 조직에는 떡 하니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선배님들이 주축이 되어 있긴 해도, 내가 없는 모임이 과연 지속성을 가지고 지금처럼 유지가 될 것인가 질문할 때 그 누구도 자신 있게 "예스"라고 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일 년에 네 번 분기별로 모임을 갖고 있는 하나의 조직에서, 우리는 이미 석 달 전쯤에 다음 모임의 날짜를 12월 10일로 고정해 놓았었다. 그런데 이년 동안 잠잠하던 동문회 밴드에, 하필이면 12월 10일에 '동문의 밤' 행사를 갖겠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언제나 우리에겐 전체 동문회가 우선이라는 불문율 같은 칙이 있었기에, 우리 조직은 동문회의 행사 일정에 맞추어 부랴부랴 모임 날짜를 조정하였다. 과의 동문 밴드에 '동문의 밤' 행사 공지가 뜬 날짜는 10월 22일이었다.


시월이 다 지나가고 11월도 중순을 넘길 즈음, 이번 집행부가 동문의 밤 행사 준비를 잘하고 있는 것으로만 무심히 생각하고 있던 늦가을의 끝무렵이었다.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가을이 황급히 종적을 감추느라 11월 하순의 저녁 공기는 매우 차가웠다.


현재 동문회 회장 긴급한 전화를 받고, 한 선배가 십수 년째 운영하는 삼겹살집 테이블에 나는 몇몇 선배들과 함께 빙 둘러앉았다. 긴급회의라고는 하지만 언제나 술이 긴급한 것일 뿐 그 자리에서 나오는 안건들이 꽤나 쓸모가 있었던 적은 별로 없던 것도 같지만, 이번 집행부의 회장 선배는 진짜로 매우 긴급해 보이기도 하였다.


불판에서 삼겹살이 지글지글 익어가고, 선배들의 술잔과 내 술잔이 불판 위의 허공에서 몇 차례 부딪히며 목구멍 속으로 시원한 소맥이 주욱 빨려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행사를 진행할 사회자를 누구로 하면 좋겠느냐는 현재 회장의 질문에, 솜씨 있게 삼겹살을 뒤적이던 삼겹살집 쥔장 선배가 현재 모 은행 지점장으로 일하고 있는 한 후배의 이름을 언급했다.


회장 선배의 폰에는 공교롭게도 그 후배의 이름이 없었다. 동문회에 있지도 않은 사무국 일을 도맡아 해오고 있던 나의 폰에는 후배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나는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있던 회장 선배에게 후배의 전화번호를 큰 소리로 불러주었다. 공일공 칠구사이 공사~라고 소리치고 있을 때, 옆에 앉아있던 선배에게서 "그냥 네가 전화해 보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장난기가 발동한 선배들은 과연 남성 후배가 금요일 저녁 시간에 일 년 선배인 여성의 전화를 받을 것인가에 대해 매우 호기심 어린 눈빛들을 발사하고 있었다. 내 폰으로 쏟아지는 그 눈빛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후배의 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세 번의 연결음 뒤에 내 폰의 건너편에서 "선배님~"하고 한 남성의 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무살 남자애들처럼 반짝거리는 선배들의 눈동자가 저들끼리 무언가를 주고받으며 허공에서 만나고 있는 동안, 그 자리의 유일한 여성 멤버나는 후배에게 정황을 간단하게 설명한 뒤에 내 폰을 회장 선배에게 넘겨주었다. 선배들의 권유에 못 이겼는지 남성적인 매력을 풍기는 굵직한 목소리의 후배는 얼떨결에 동문회의 밤 사회자로 그날 밤에 지정되었다.


몇 해 전 동문 체육대회의 진행을 맡았던 후배의 목소리는 일명 동굴 보이스였지만, 수려한 인물과 재치 있는 말솜씨가 동굴보이스의 약점을 커버하고 있었다. 그 시각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사회자 감으로 아무도 나의 존재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내가 세 시간 행사의 진행을 맡게 될 것이라고는  단 1프로의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동문의 밤 사회자가 정해지고 며칠 뒤, 현재 동문회 회장은 <동문회 TFT>라는 제목의 단톡방을 열었다. 부회장, 총무, 사회자, 그리고 나까지 포함하여 동문회 TF팀은 총 다섯 명으로 출발하였다. 앞으로 동문의 밤 행사까지 17일이 남아있을 때였다.


그때만 해도 집행부의 임원들은, 작은 규모로 진행되는 동문회 행사라고는 해도 소홀히 할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은행의 지점장으로 퇴임한 회장 선배조차 동문회 TF팀을 꾸리면서, 기업체에서 개최하는 대규모의 컨벤션 진행이 아니기에 조금 방심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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