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니 림의 탄생 3

(태풍 속 보라카이 여행기)

by 도라지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여행사 팻말이 보인다. 같은 여행사를 통해서 여행 상품을 구매한 관광객들이 팀별로 가족별로 팻말을 향해서 모여들었다. 총 다섯 팀, 인원은 총 14명이었다. 나는 가이드도 아니면서, 순식간에 인원 파악을 한다.


필리핀은 한국보다 한 시간 느리다. 휴대폰은 현지 시간으로 밤 아홉 시를 표시하고 있었다. 인천 공항에서 이륙이 삼십 분 늦어지는 통에, 도착 시간도 늦어졌다. 여행사가 제시했던 스케줄대로라면, 우리 팀은 밤배를 타고 보라카이섬으로 들어가, 깨끗한 호텔에서 첫날밤을 보내야 한다.


공항에서 팻말을 들고 기다렸던 한국인 가이드가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네 시간 동안 비행기 타고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현지 가이드를 맡게 된 쟈니 윤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쟈니 윤? 쟈니 윤이라면, 우리 세대는 알고 있는 그 <쟈니윤 쇼>의 쟈니 윤과 이름이 같다. 라스트 네임은 굳이 바꾸지 않을 테고, 앞에 쟈니는 닉네임을 쓰는 거 같았다. 쟈니가 다시 말했다.


"태풍 하나가 지나갔는데, 또 다른 태풍 하나가 오고 있어서, 오늘 오후엔 부두가 폐쇄됐어요. 내일 새벽 기상 상태가 좋아지는대로 보라카이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뭣이라고? 오후부터 부두 폐쇄, 일정 변경? 오후 2시 인천공항 여행사 데스크 미팅에서도, 일정대로 스케줄 진행 가능하다고 안내를 했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다. 부두 폐쇄 시간이, 한국 시간으로 오후 2시 이후였을 수도 있다.


쟈니가 기상 상황이 좋지 않아서 급하게 잡았다는 숙소로 일행을 안내했다. 새벽 4시에 숙소 앞에서 모이자고 약속을 하는 쟈니의 마르고 기다란 몸이 바삐 움직였다. 쟈니의 핼쑥한 얼굴을 향하여, 일행 중 누구도 숙소의 상태에 대해 불평을 내놓지 않았다. 캐리어를 옮기는 일행들의 발걸음만 허름한 숙소의 복도를 가득 채웠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여행자에게 낮과 밤, 사계절에 순응하여 사는 삶을 일부 훼손하도록 만들곤 한다. 특히나 패키지여행 중엔, 아직 칠흑 같은 새벽부터 부지런해야 할 때도 있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시간 체크는 언제나 내 몫이다. 부모님은 내게 게으른 유전자도 주셨지만, 민첩하고 성실한 유전자도 넘겨주셨다.


능숙하고 재빠른 비서 하나를 두고 사는 남편은 어디서든 느긋하다. 새벽 네시 소집 시간을 맞추느라, 나는 거의 선잠을 잤다. 새벽 세시부터 이방 저방에서 나는 소리들로 시끄러웠다. 여자들만 넷이 온 팀도 있었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친구들 같았다. 여자들은 여행 중에 유난히 더 바빠진다.


수선스러운 새벽에 숙소 앞에 사람들이 모이고, 일행은 부둣가를 향해 버스를 달렸다. 부두에는 우리 팀 말고도, 보라카이로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아침 여섯 시가 되었는데도 태양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바다는 여전히 잿빛이었다. 그리 호화롭지도 청결하지도 않은 큰 배를 타고 우리는 생애 처음으로 보라카이섬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뿌옇게 흐려있는 날씨 속에서도 마치 환하게 빛나는 태양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밝게 웃고 있었다. 같은 팀 일행들도 관광객 무리에 섞여서 잘 보이질 않는다.


저쪽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두 딸을 데리고 온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딸들은 피곤해서 두 눈을 감은 채로 말이 없고, 엄마는 신이 나서 종알거린다. 순박해 보이는 그녀의 수다가 밉지 않아 보였다. 그 옆에서 휴대폰으로 선상 위의 가족들 사진을 연신 찍어대는 아빠의 모습도 정감 있어 보인다. 뿌연 잿빛의 바다를 배경으로 잠에서 깬 두 딸을 둔 가족들이 환하게 웃었다.


(2021년 9월 26일 씀)








이전 13화쟈니 림의 탄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