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니 림의 탄생 4

(태풍 속 보라카이 여행기)

by 도라지

관광객들을 태운 배가 섬의 선착장에 닿았다. 보라카이섬 부두는 낡고 초라했다. 허름한 판자들로 엮어지고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검은색 쇠철 문을 통과하여, 일행은 오토바이가 끄는 마차 같은 걸 나누어 탔다.


"룸에 짐 푸시고, 아침 식사하시면 됩니다. 아침 식사 시간은 오전 7시부터 10시까지 제공되니 참고하세요. 점심 식사는 밖에서 진행되며, 열두 시에 로비에서 만나는 걸로 하겠습니다~"


쟈니가 필요한 말만 전하고, 팀별로 룸키를 나누어주었다. 남편이 8층 방에 들어서며 말했다.


"어, 웬일로 호텔 좋은 델 얻었네~"


남편과 두 차례 여행을 할 때, 가장 저렴한 상품부터 도전을 했었다. 첫 번째 여행지의 호텔 컨디션이 영 엉망이었던 걸, 남편은 아직도 되새김질하고 있는 거다.


"이젠 우리가 나이도 있고 하니, 중간 정도는 가야쥬~"


불면증이 있는 나는 잠자리에 예민한 편이다. 여행상품 비용은 비행기와 호텔값에 비례한다는 걸 아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몇 분이면 충분하다. 이제 남편과 나도 쉬엄쉬엄 편안하게 휴식하는 여행을 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


짐 정리를 간단히 하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아침 식사를 많이 하지 않는 남편에 비해, 나는 이것저것 많이 먹는다. 머릿속에 조식비 계산이 있기 때문이다. 남편이 몸매 유지를 위해 접시를 아끼는 동안, 테이블 한쪽으로 나의 접시만 수북이 쌓인다.


"곧 점심 먹으러 나갈 건데, 그만 먹지~"


마누라가 돈 아까워서 저러고 포식 중임을 눈치챈 남편이 내 손목을 잡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비를 통과하여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는데, 정원 나무에 후두둑 빗방울이 내리고 있었다. 쉽게 그칠 비로 보이지 않았다. 룸으로 올라와 다시 가방 정리를 시작했다. 여기서 사흘 밤을 자고 월요일에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지난밤은 예상치 못한 숙소에서 날을 지새고 온 터라, 앞으로 이틀 밤을 이 방에서 자야 한다.


필리핀에선, 룸에 두고 나온 물건들 가운데 무언가 없어지기도 한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공연히 그 말이 떠올라서 꺼냈던 물건들 중에 다시 캐리어로 집어넣기를 몇 번 반복하는데, 갑자기 캐리어 비번이 작동하질 않는다. 뭔가 잘못되었다. 남편이 침대에 누워, 안 해도 되는 말을 자꾸만 한다.


순간 당황했다가 차분해진 내가 말했다.


"데스크에 연락 안 해도 돼요. 연장 없이 내가 해결할게요~"


종이와 펜을 준비했다. 다행히 세 자릿수다. 000부터 출발하여 번호를 맞추고 열어본다. 열리지 않으면 그 숫자를 종이에 적어나간다. 다음엔 001, 002, 003...... 그렇게 한 시간을 맞추고 돌리고 적기를 반복했다. 어느 순간 "딱" 하고 캐리어가 열렸다. 유레카~


누구에게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난관이 찾아오기도 한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마음 속에서 빨리 포기하고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현명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무언가를 해볼 수 있는 상황이라면,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밀어붙여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 나는 끈질긴 구석이 있는 사람이다.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악착같이 침착하게 일의 끝을 본다. 남편과 살면서 이 근성은 더욱 향상되기도 하였다. 오작동된 캐리어 비번 찾는 수고쯤 아무것도 아니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때까지, 캐리어는 오픈해놓기로 했다.


마누라가 캐리어랑 씨름하는 동안, 남편은 어느새 잠이 들었다. 창밖으로 빗줄기는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2021년 9월 27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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