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니 림의 탄생 6

(태풍 속 보라카이 여행기)

by 도라지

다음 날 상황은 더 심각했다. 밤새 퍼부은 비로 호텔 근처가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오토바이도 대형 버스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건물 밖에선, 허벅지까지 물이 차는 곳도 있었다.


아침에 호텔서 조식 먹고, 오후 2시쯤 쟈니가 점심 도시락을 룸마다 배달해 주었다. 누구는 그 도시락을 '먹을 수 없는 맛'이라고도 표현했다.


"현지인들이 먹는 도시락인가 봐~맛은 좀 그래도 맛있게 먹어봅시다~"


남편이 먼저 위로의 도시락 멘트를 내게 날렸다. 다행이었다. 컵라면 한 개를 뜯었다. 내가 도시락을 알뜰하게 다 비우는 동안, 남편은 컵라면을 맛있게 먹는다.


방 안에만 있는 것도 갑갑하고, 다른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 로비로 내려가 보았다. 내일 아침 이 섬을 탈출해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웠다.


로비에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있었다. 여기저기서 한숨 섞인 걱정들을 늘어놓는다.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이러했다. 우리가 필리핀에 도착한 금요일 오후부터 보라카이섬을 빠져나가지 못해서 밀려있는 팀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거였다. 우리가 이 섬에 들어오던 토요일 새벽에, 운좋게 이 섬을 빠져나간 팀들은 행운의 여신이라도 만난 셈이었다. 내일 오후 정도면 바다 날씨 상태가, 배를 타고 나가도 될 수 있을 거라는 비전문가적인 추측도 돌고 있었다.


태풍으로 비행기 이착륙이 어려운 건 당연하고, 우선은 이 섬에서 배를 타고 공항이 있는 뭍으로 빠져나갈 수 있느냐가 관건 같았다. 이대로 이 섬에서 더 며칠을 갇혀있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큰일이었다.


남편은 지난 금요일 아침에, 잠깐 사무실에 출근을 했었다. 직원들 업무 중인데, 난데없이 보라카이로 휴가를 떠난다는 말을 꺼내기가 민망했던 남편이, 외부 출장 간다 하고 공항 리무진을 탔었다. 월요일 오후에 한국 도착해서, 화요일엔 정상 출근이 가능할 줄 알았다. 내일이 월요일이다. 기필코 이 섬을 제때에 탈출해야만 한다.


여자 넷이 온 팀 가운데 두 명이 우리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고 인사를 나눈다. 그녀들은 자신들을 어린이집 원장들이라고 먼저 소개했다. 네 명 모두 각기 다른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는 원장들이라 했다. 직원들을 두고 경영 중이긴 해도, 스케줄상 빨리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다행히 저녁식사를 할 무렵에, 거칠게 쏟아붓던 폭우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듯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갑갑한 걸 싫어하는 남편과 샌들 신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어제만 해도 해변가 식당과 카페들이 번쩍번쩍 찬란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하루 사이에 지붕이 무너져 내린 곳도 눈에 띄었다. 영광스럽던 시절이 하룻밤 새 사라지기도 하는 우리네 삶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쟈니는 단톡방에서, 짐 정리해서 내일 새벽 4시 반에 로비로 집합하자는 내용의 글을 남겼다. 조식이고 뭐고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린 이 상황에서, 누구도 반대 의견을 내놓지 않는다. 모두들 이 섬을 한시바삐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폭우에 갇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보라카이 둘째 날을 그렇게 속절없이 빗물에 흘려보냈다.


(2021년 9월 29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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