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니 림의 탄생 8
(태풍 속 보라카이 여행기)
관광객들을 태운 버스가 도로에서 멈추고, 이십여 분이 흘렀을 때였다. 쟈니와 또 다른 가이드가 말했다.
"도로가 파손돼서 임시 복구도 어렵다 합니다. 저희 여행사에서 긴급히 다른 버스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고객님들께는 죄송하지만, 다른 버스가 반대편 도로로 도착하는 장소까지, 각자 캐리어를 끌고 이동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진짜 피난민이라도 된 것처럼 각자의 여행가방을 끌고 이십여분을 걸었나 보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은 있었다. 비행기가 뜨려면 아직 한 시간 반이 남았다. 캐리어를 끌고 오르막길을 올라가는데, 저쪽 가족의 첫째 딸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거 같았다.
초등 2~3학년쯤으로 보이는 아이에게 내가 물었다.
"너는 커서 무슨 일을 하고 싶어?"
"음.. 기자가 되고 싶기도 한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얼굴이 붉어졌던 아이가, 도로 침착해진 낯빛으로 대답했다. 아이 옆에서 캐리어를 끌며, 내가 말했다.
"핸드폰 있지? 아줌마가 잠깐 니 캐리어를 맡고 있을 테니까, 지금 캐리어 끌고 걸어가는 사람들 모습을 한번 찍어봐~기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실망하거나 좌절해선 안돼. 한국에 돌아가면 이번 여행도 기억이 아주 많이 날 거야~"
아이는 금세 밝아진 얼굴로, 어깨에 사선으로 메고 있던 핑크색의 작은 백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이가 휴대폰으로 사진을 몇 장 찍는 사이, 나는 캐리어 두 개를 양손에 하나씩 끌면서 다른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곳에 도착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버스에 올라탔다. 이제 진짜 안심해도 되는가 싶었다. 우리 팀이 한국에서부터 예약해두었던 비행기 이륙 시간까지, 아직 시간은 가능해 보인다. 이대로 버스가 별 탈 없이 공항에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 도로 피난민이 된 기분이었다. 우리를 태울 구조 비행기가 다른 피난민들을 먼저 태우고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사뭇 간절해졌다.
아까 구글 지도를 보여줬던 젊은 부부의 남편이 좌석 뒤에서 내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힘들 거 같은데요.. 섬에서부터 벌써 며칠째 못 나갔던 팀들이 밀려 있는데, 여행사에서 그쪽부터 비행기에 태우지 않겠어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섬에 갇혀 있다가 탈출한 사람들이 우리들만은 아닌 것처럼, 우리보다 며칠 앞서 한국으로 돌아갔어야 하는 사람들이 여행사에 항의를 할 것은 불 보듯 자명했다. 현지 가이드들은 한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여행사 소속도 아니었다. 현지 업체에 소속된 직원들로, 정식 직원이라고 할 수도 없는 좀 복잡한 사정들이 있을 것이다. 쟈니와 또 다른 가이드 역시, 이런 상황에선 우리처럼 약자의 입장일 수도 있다.
공항을 향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비행기에 탑승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여, 뒷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행기 이륙시간을 삼십여분 남기고 버스가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건물 바깥으로, 사람들이 까맣게 진을 치고 있었다. 수백 명이 넘는 사람들로, 공항 바깥 도로까지 인산인해였다. 속으로 갑자기 궁금해졌다.
'저 사람들은 섬에서 언제 빠져나와서 공항에 벌써 도착해 있는 거지? 오늘 아침 우리랑 첫배를 탔던 사람들인가? 아니면 며칠간 날씨 탓에 비행기가 안 떠서 미리 공항 근처에 나와있던 사람들일까..?'
공항 앞 도로 근처까지 줄을 서서 앉아있는 사람들은, 얼추 어림잡아도 족히 삼백 명은 넘어 보였다. 공항 건물 안에도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비행기 타려는 사람들의 숫자는 파악조차 어려웠다.
당연히 탑승권을 갖고 있으니, 우리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당당히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 출국 수속을 밟을 줄 알았다. 그런데 쟈니가 여러 줄로 서 있는 사람들 뒤에, 우리 팀도 줄을 서라고 한다. 쟈니가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 우리의 탑승 권리를 곧 밝히고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며 줄을 섰다.
그런데 이십여분 뒤 돌아온 쟈니가 말했다. 우리가 조금 늦게 도착해서 비행기가 막 떠났다고 했다.
(2021년 10월 1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