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니 림의 탄생 10

(태풍 속 보라카이 여행기)

by 도라지

쟈니가 공항 근처 식당으로 안내를 했다. 든든하게 먹고 나니, 모두들 표정이 한결 유해진 것도 같았다. 식사 후 쟈니가 숙소로 우리를 인도했다. 숙소마다 우리 같은 관광객들로 꽉 차서 간신히 숙소를 잡았다고, 쟈니가 본인의 능력을 떠벌린다. 우리 부부가 배정받은 방에는 티브이 같은 전자기구가 없는 것은 물론, 판자를 얹어놓은 침대마저 싱글 사이즈 한 개뿐인 방이었다. 욕실마저 없는 방도 있어서, 공동욕실을 이용해야 하는 방도 있었다.


어린이집 원장님 일행은 욕실부터 이용하느라 바쁘다. 새벽부터 이동했던 탓에 제대로 머리도 못 감고 나왔다고, 여자 네 명이 이방 저 방 신세를 지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지난 금요일, 직원들에게 말도 없이 비행기를 탔던 남편이 황급하게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황 과장, 나 보라카이에 와있어. 혹시 거기 뉴스에서 필리핀 보라카이 태풍 기사 같은 거 못 봤어? 오늘 비행기 타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태풍 때문에 한국에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 최대한 빨리 갈 수 있도록 할 테니,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사장이 태풍 속 보라카이에 와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사무실 직원들은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저절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나 보다. 통화하던 남편이, 피난민 쪽방 같은 판자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워서 큭큭큭 웃고 말았다.


휴대용 드라이기를 빌리러 온 원장님 일행이 수선스럽게 우리 방을 빠져나가고, 나는 휴대폰을 꺼내 들고 몇 줄의 글을 적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는 방송사 선배에게, 여기 사정을 전달하고 싶었다.


쟈니가 콜라도 딸리지 않은 햄버거만 달랑 사들고 우리를 숙소 로비로 모이라고 했다. 낡고 누추한 소파가 놓여 있는 곳에는, 다른 여행사를 통해 온 관광객들도 더러 있었다.


낯선 청년이 내게 물었다.


"어느 여행사에서 오셨어요?"


"00 투어요. 그쪽은요?"


"저는 000 여행사요. 그 회사는 메이저회산데, 숙소를 어떻게 이런 데를..."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가 다시 말했다.


"전쟁터가 따로 없어요. 한국에서 우리 이런 사정을 알고 있을까요?"


"언론에 흘려야지요. 국민청원게시판에 비행기라도 증편해달라고 글을 올리던가요."


국민청원게시판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나는 그것이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언제든 기록은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관광객들 가운데 최고위 공무원이 있지 않는 한, 비행기 증편은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낯선 청년이 아이패드를 펼치고 무어라 적는 것 같았다. 무어라도 하려는 의지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콜라도 없는 햄버거를 먹다가 화가 난 원장님 일행이, 다시 짐을 싸서 공항으로 나가자고 사람들을 부추겼다. 이대로 헛간 같은 숙소에서 하루를 보내느니, 차라리 공항 건물 앞에 줄 서있는 게 마음이 편할 거 같다고 했다. 그래야, 우리도 순서가 되어 비행기 티켓을 구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일리 있는 말이다.


당황한 쟈니의 말은 무시한 채, 사람들이 다시 캐리어를 끌고 로비 앞으로 모였다. 공항까지 걸어서라도 가겠다는 결단력이었다. 원장님 일행은 신선한 샴푸 향을 풍기며 깔끔해진 모습으로 일행들 앞에 섰다.


다시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네시쯤 된 거 같다. 그 사이 공항 앞에서 장사진을 치던 사람들의 무리가 조금 줄어 있었다. 오늘 떠나는 비행기표는 아니라 해도 순서대로 하루씩 늦어지는 비행기표를 구하고, 허름한 숙소로 안내를 받아서 갔을지도 모른다.


공항 건물 바깥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드디어 우리 팀도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공항 건물 안에도 기다란 줄은 한참이었다. 원장님 일행 중 대장 같은 분이 연신 왔다 갔다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로 다가와서 말했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가 지금 금요일 거래요. 그러면 너무 늦을 거 같은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오늘은 월요일이었다. 그러자 구글 지도를 내게 보여주며 오늘 벌어질 일들을 미리 예언했던 남자가 말했다.


"그러면 다른 도시를 경유해서 돌아가는 건 어떨까요?"


우리 팀은 총 다섯 팀에 14명이었다. 그중에 신혼으로 보이는 커플은, 다시 보라카이로 들어가서 놀다가 금요일 비행기를 타겠다고 했다. 나머지 네 팀의 12명은 다른 도시 경유에 찬성했다. 문제는 12명을 동시에 한 비행기에 탑승시키는 것이다.


가이드 쟈니는, 다른 도시를 경유해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에 관해선 우리들의 의사이므로, 현지 업체에선 아무것도 해드릴 게 없다고 했다. 여기서부터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다시 현지 업체 부장이 등장했어도 달라질 게 없었다.


하루속히 한국으로 가고 싶은 원장님 일행 네 명과, 딸 둘을 데리고 온 가족 네 명, 구글 지도 부부 두 명과 우리 부부 두 명, 총 열두 명이었다.

부장이란 사람이 말했다.


"저 앞에 여기 여행사가 있으니, 거기 가셔서 항공권을 알아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우리 팀 열두 명이 필리핀 현지 여행사 사무실 앞으로 캐리어를 끌고 이동했다. 사무실 안에는 몸집이 큰 필리핀 여자 두 명과 계속해서 우리 쪽을 주시하고 있는 눈이 큰 필리핀 남자 한 명이 보였다. 구글 지도 커플팀 여자가 내게 말했다.


"언니가 우리들 티켓팅 좀 해주세요~"


갑자기 사람들의 눈들이 내쪽으로 향했다. 항공권 값이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었다. 스카이스캐너 같은 앱이 깔려있지도, 사용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사무실에서 열두명의 티켓팅을 하면 된다. 마닐라보다는 세부 쪽으로 경유해서 가는 편이 나을 거 같았다.


요란스러운 원장님 일행 네 명부터 차례대로 한 명씩 서류 작성하고 배기지 체크하고, 세부행 티켓 하나와 세부 막탄 공항에서 인천공항 가는 티켓 하나 총 두장씩 발급받는 데 시간이 꽤나 걸렸다. 가족이 아닌 탓이었다. 다음엔 구글 지도 부부, 그리고 딸 둘네 가족팀 차례였다. 딸들 아빠가 급하게 말했다.


"가져온 돈도 다 썼고, 신용카드도 안된대요~"


내 카드로 그들 가족의 항공권을 대신 끊었다. 마지막 우리 부부의 항공권을 끊는데, 원장님 일행보다 항공권 값이 약 1.5배로 올라 있었다.


(2021년 10월 3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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