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니 림의 탄생 12(최종회)
(태풍 속 보라카이 여행기)
제이파크에서 아름다운 저녁 해변의 정취를 만끽하며, 우리들은 칵테일과 맥주를 곁들인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다. 사진작가 놀이를 하는 동안 원장님 일행과 쟈니 림은 부쩍 친밀해진 느낌이었다.
아침에 칼리보 공항에서 호텔 예약을 했던 방보다, 두 배 이상 비싼 스위트룸으로 방 하나가 업그레이드되었다고 원장님들이 자랑을 한다. 그리고 우리를 그녀들 방으로 초대를 했다. 그녀들 덕분에 난생처음 스위트룸이란 곳을 구경해 보았다. 스위트룸 안에 딸린 거실만 해도 우리 방의 두 배는 족히 돼 보였다. 딸 둘네 가족방이 여기로 배정되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원장님들 방 하나를 구경하고 나와서, 딸 둘네 방도 들러보았다. 다행히 우리 방보다 침대가 크고, 방도 더 넓어 보였다. 그만하면 나쁘지 않았다. 두 딸의 엄마가 내 손을 잡으며, 큰 딸의 학교 생활 이야기와 가족 첫 해외여행을 보라카이로 오게 된 경위를 한참 동안 풀어놓는다. 아픈 속내를 내보이는 그녀의 얼굴 뒤로, 딸들은 어느새 곤히 잠들어 있었다. 닷새만에 모두가 평화로운 밤이었다.
다음 날은 호텔에서 조식 먹고 로비에서 12시 30분에 모이기로 했다. 점심은 공항에 가서 각 팀별로 식사를 할 계획이었다. 모두들 느긋하게 아침식사를 마친 뒤, 컨디션들이 좋은지 호텔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자고 약속들을 한다.
방으로 돌아와서 수영복을 챙겨 입는 남편에게 내가 물었다.
"수영모자도 드려요?"
남편은 아는 얼굴들이 있는 곳에선, 물속에 잘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남편 쪽 집안은 머리숱이 아예 없는 분들이 더 많다. 그나마 남편은 머리숱 방어에 비교적 성공한 사례다. 결혼 생활 동안 머리털 사수 총력전이 빚어낸 쾌거였다. 그렇다 해도 원장님 일행은 우리 나이 또래의 여성들이다. 본래대로라면 남편은 이런 상황에서 다른 핑계를 대고, 아예 수영장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쟈니 림을 찾아대는 원장님들 등쌀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관계라도 되는 것처럼 남편이 단단히 채비를 하고 있다. 남편이 잠시, 수영모를 쓰느냐 마느냐의 중차대한 상황과 마주하여 심각하게 고민을 한다. 머리털 상태를 여러 번 확인하고, 수영모자를 썼다 벗었다를 반복한다. 그리고 비장하게 결단을 내렸다. 수영모자는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물놀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언제 무슨 상황에서 우리 팀원들의 호출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옷을 그대로 입은 채로 남편을 따라 야외 수영장으로 향했다.
그날은 옷을 입고 파라솔에 앉아있는 내가 사진기사에 당첨이 되었다. 하하호호, 까르르까르르, 원장님들의 웃음소리가 요란하지만 즐겁게 들렸다. 보라카이 태풍 속 피난민 시절은 온데간데없고, 럭셔리한 사모님들이 세부의 뜨거운 태양 아래 한가롭게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구글 지도 부부도, 딸 둘네 가족도 모두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했다. 평화롭게 물놀이를 즐기는 그들을 바라보는데, 내 마음이 흐뭇했다.
원장님들이 수영장에 딸린 미끄럼틀에서 쟈니 림을 밀어서 물속에 빠트리며 즐거워했다. 물속에 빠졌다가 나온 쟈니 림의 머리칼이 금세 누군가 베어 물고 간 듯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쟈니 림은 그걸 못 보고 마냥 재밌어한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다. 옅은 보랏빛으로 머리를 물들인 원장님이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라카이 여행을 온 게 아니고, 세부 여행을 온 거 같아요~ 호텔도 어제 제이파크 투어도 완전 원더풀이에요~ 다 쟈니 림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쟈니 림 투어, 백점 만점에 백점~"
그날은 수요일이었다. 오후에 막탄 세부 공항을 출발할 때쯤, 딸 둘네 가족이 집 가는 차편을 걱정한다. 인천공항에서 소도시로 가는 공항버스는 조금 더 일찍 차편이 끊기는 것 같았다. 나는 예매해 두었던 인천발 청주행 리무진을 취소했다. 제대해서 집에 있던 큰아들이 밤 열 시에 인천공항으로 남편 차를 몰고 왔다. 그 차를 타고 딸 둘네 가족을 바래다주고, 드디어 우리도 집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원장님 일행은 여행사를 상대로 소송을 하느니 마느니 부산을 떨었지만, 다 흐지부지되었다. 나는 딸 둘네 엄마로부터 비행기 삯과 호텔료를 다 받았다. 덤으로 과일 선물까지 받았다. 그제야 비로소 보라카이 여행이 진짜로 끝이 났다.
쟈니 림은 가장 재밌던 여행으로 보라카이 여행을 꼽는다. 태풍 속에서 보라카이섬에 갇혀있던 어두운 잿빛의 날들과 칼리보 공항을 향한 험난한 여정에 대한 기억보다도, 세부의 찬란한 태양과 네 명의 여인들과의 짧지만 그래서 더 눈부신 추억들이 기억에 남아 있어서 그런가 보다.
쟈니 림이란 새 이름까지 얻은 여행이었으니, 남편에겐 충분히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여행일 것이다. 보라카이섬에서 탈출했던 월요일 저녁에 마누라가 짧은 영어로 필리핀 여행사 직원들과 열두명의 비행기 값을 흥정하는 사이, 네 명의 원장님 일행은 기사 작위 수여하듯 가이드 쟈니의 이름을 내 남편에게 물려주었다. 화요일, 마누라가 가이드 자격증도 없이 열두명이 묵을 호텔과 투어 일정을 고민하고 실행하는 동안, 쟈니 림은 네 명의 여인들과 함께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리고 수요일, 막탄 세부 공항을 떠나면서 여인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그의 전성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삼일천하였다.
쟈니 림의 와이프는 어떨까? 보라카이 여행 이후로, 그녀의 해보고 싶었던 직업군 목록에서 여행사 가이드 일은 삭제되었다고 한다. 그 뒤로 쟈니 림의 사무실 직원들은 사장이 보이지 않으면, 보라카이 가셨느냐고 장난스럽게 묻곤 한다. (끝)
그동안 <쟈니 림의 탄생>을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21년 10월 6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