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니 림의 탄생 7
(태풍 속 보라카이 여행기)
필리핀에 도착했던 첫째 날 밤처럼, 내일 새벽 일찍 짐을 꾸려 떠날 생각에 쉽게 잠이 오질 않았다. 캐리어를 끌고 일행들이 모이자, 쟈니가 올 때랑 똑같이 몇 대의 트라이시클에 팀들을 나누어 태우고 선착장으로 향했다.
선착장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검은색의 낡고 오래된 철문 앞에, 셀 수도 없을 만큼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며칠 동안 서로 다른 리조트와 호텔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호전된 날씨에 한꺼번에 우르르 선착장으로 몰려나온 까닭이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배를 탈 수 있을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불안한 사람들의 눈빛이 어찌 된 일인지 험악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누군가 철문의 앞자리를 빼앗기라도 하면 큰 싸움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 인간이 인간의 품위를 버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 보인다.
딸 둘을 데리고 온 우리 팀의 가족 일행은 이산가족이라도 될까 봐, 한껏 긴장해있는 표정이 역력했다. 딸 둘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이 측은했다. 어떤 젊은 여자는 젖먹이로 보이는 아기를 품에 꼭 안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캐리어 위에 그녀를 앉히며, 그녀의 등을 토닥거린다. 그날 새벽 보라카이 선착장 철문 앞의 풍경은, 구조를 기다리는 전쟁 피난민들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철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벌떼처럼 선착장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피난민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 한국 사람들이었다. 가이드들이 선박 티켓을 나눠주자, 사람들이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나는 배가 떠날 때까지, 오래돼서 낡은 선착장의 정경을 눈으로 하나씩 담아 둔다. 아름다운 기억 하나 남기지 못하고 떠나지만, 내 남은 생에 언제 다시 이 섬을 올 수 있을까 아쉬운 마음마저 들었다. 허름한 선착장 너머로, 아침 햇살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져지는 햇살이었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피난민의 몰골이 아닌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배가 까띠끌란 부둣가에 닿을 때쯤엔, 바다 한가운데서 벌건 태양을 본 것도 같다. 세상을 삼켜버릴 듯이 거칠었던 어제의 잿빛 바다는 온데간데없고, 오늘의 바다는 눈부신 푸른색을 뽐낸다. 마치 "내 모습은 원래 이렇게 멋진 걸~"하며 자랑질하듯이 아침부터 바다가 파랬다. 아름다웠다. 그 푸른 바다 위를, 아침을 굶은 관광객들을 태운 배가 쉼 없이 달렸다.
까띠끌란 부둣가에서 내려서,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혹시나 배를 놓칠까 봐 우리 팀이 새벽부터 일찍 서두른 탓에, 여행사에서 준비한 버스 대절 시간과 착오가 있었나 보다. 시계를 보니, 비행 탑승 시각까지 네 시간이 남아있다. 무사히 비행기를 탈 수 있겠구나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비로소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것 같았다.
부두에서 공항까지는 차로 두 시간 반이면 매우 충분한 거리였다. 버스가 도착하고 예정대로 공항을 향해 출발했다. 버스엔 같은 여행사의 다른 팀도 함께 탔다. 여행 일정 상, 우리보다 하루 먼저 보라카이섬을 빠져나갔어야만 했던 팀이다.
두 팀을 태운 버스가 공항을 향해서 달리는데, 우리 팀 가운데 우리 부부보다 예닐곱 살 젊어 보이는 한 커플의 남편이 내게 휴대폰을 보여준다. 구글 지도였다. 그는 내게 우리 버스가 공항으로 가는 길의 반대편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고 은밀하게 말했다. 지도를 보니 어차피 이쪽으로 가도 중간 지점에서는 하나로 길이 만나지는 것도 같았다. 그래도 걱정스러운 그쪽 남편이 자꾸만 내게 눈치를 준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버스 안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연기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는데, 갑자기 버스가 길 한가운데서 멈춰버린다. 폭우로 인해 도로가 파손돼서 더 이상 버스가 달릴 수 없다고 했다. 쟈니와 다른 팀 가이드가 버스에서 내려서 도로 상태를 확인하고 올라온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온 것처럼, 사람들에게 글씨가 인쇄된 종이 한 장씩을 나누어준다.
"자연재해로 인한 기상 악화로, 고객님들께서 제대로 휴가를 즐기지 못하신 점에 대해, 귀국 후에 컴플레인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서류입니다. 여행사 업무상 늘 받고 있는 서류이니, 맨 아래 수기로 서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종의 서약서 같은 것을 나누어주는 가이드들의 얼굴이 어두웠다. 누군가 큰소리로 말했다.
"해외여행 숱하게 다녔어도, 여행 중에 이런 서약서에 사인하라고 강요하는 여행사도 처음이고, 이런 것도 처음입니다. 무턱대고 서명하지 마세요."
그의 말에 놀란 두 명의 가이드가, 더 이상 서명하도록 강요하지 않은 채로 서약서는 흐지부지되었다.
(2021년 9월 30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