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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Dec 26. 2022

동문회 준비 일지 6

응어리

요즘 대박 난 드라마에서처럼 재벌가의 경영 승계를 위한 것도 아니요 기업 간 인수 합병을 위한 은밀한 작전도 아니지만, 나는 별 것도 아닌 동문회 행사에 무척 진심이었다. 특별한 이익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남들은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을 때, 세상에는 그 시시하고 사소한 것에도 백 프로 진심과 노력을 다하는 사람이 존재하기도 한다는 것이 세상이 재밌게 굴러가는 또 하나의 이유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동문회 행사에 필요한 모든 자료들을 만들어 TFT 단톡방에 공유하였지만, 내가 직접 작성한 사회자 대본과 퀴즈게임용 질문지만큼은 공유하지 않았다. 숨은 그림자처럼 온갖 일을 다 하고 어이없게 토사구팽 당하지 않으려면, 아무도 갖지 못한 나만의 무기가 있어야 했다. 본인의 업무에 쫓기어 TFT 미팅에도 시간내기가 어려웠던 사회자 후배는, 나의 숨겨진 의도를 알아채고 행사 일주일 전에 사회자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사회자로 내정되었던 후배의 자진 사퇴 선언과 단톡방 탈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문회 회장은 내게 후배와의 공동사회를 계속해서 권유하였다. 무슨 대단한 벼슬 자리도 아니고 사회자를 꼭 남성으로 세워야 한다는 동문회 전통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회장 선배는 내가 단독 사회를 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도 같았다.


물론 내가 짬짬이 영어 기간제 교사와 3년 차 철학 강사라는 경력을 가지고 있긴 해도, 강의 영역과 행사 진행의 영역이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나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입 있고 머리 있고 동문들 이름과 하는 일 정도 알고 있으면, 세 시간 행사 진행이 아주 불가능한 것만도 아닌 상황이었다.


후배와 함께 공동으로 사회를 진행하라는 권유가 계속될수록 한번 뒤틀려버린 나의 의지는 더욱 견고하게 불타올랐다. 사회자로 지정되었던 후배와 회장 선배의 입장을 아주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남성 중심의 세상과 남성 중심의 동문회를 향한 일종의 응어리 같은 것이 내 안에서 차갑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요즘은 예전과 달라서 팀원들 간의 업무 협의와 전달도 매우 수월해졌기에, 온라인에서 대면 회의를 진행하기 위해 구태여 바쁜 일정들을 맞출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도 80년대 대학의 정서를 가지고 있는 동문회 선배님들은, 행사 준비를 하며 고생하는 후배들을 직접 만나 밥 한 끼 사주며 격려해주고 싶은 애정을 갖는 분도 계셨다.


내가 기획총괄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제 멋대로 행사를 설계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선배님 한 분이, 급기야 행사 이틀 전에 격려 차원의 식사 자리를 제안해 오셨다. 나는 행사의 모든 준비를 일단락 지어놓은 상태였다. 1기 선배님의 식사 초대는 물론 감사하였지만, 행사를 이틀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갑작스러운 식사 초대가 부담스러웠던 나는 선약을 핑계로 그 자리를 회피하였다.


동문의 밤 행사를 위해 미친 듯이 달려온 지난 보름의 수고와 노력을, 코 앞에 디데이를 두고 대선배님의 조언에 따라 다시 수정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지금까지의 기획과 준비를 가지고 행사를 진행하기로 나는 결심했다. 나만큼이나 동문의 밤 행사에 백 프로 진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편으론 대선배의 조언 역시 진심으로 따르던 회장 선배가, 나와 다른 임원진들의 생각을 존중하여 그날 저녁 혼자서 대선배님의 식사 초대 자리에 나갔다.


동문회 행사가 다른 과 동문회 행사와 경합하여 누가 더 잘했느냐 점수를 매기는 콘테스트도 아니고 역대 집행부의 행사와 비교하여 채점하는 자리도 아닌데, 몇몇 선배들의 한가로운 관심은 자칫 수고하는 팀원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지나친 간섭이 될 수도 있었다. 매사에 섬세하고 신중한 인문학도 남성들의 보편적인 캐릭터는 동문회 행사 준비 과정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되기도 하였다.


이번에 홈커밍데이 행사는 우리 동문회에서 처음 시도하는 컨벤션 행사였다. 내가 동문회에 발을 담근 이후로 지난 십오 년 동안 5~6회의 체육대회와 몇 차례의 산행이 개최된 적은 있었지만, 늘상 모이는 한 선배의 삼겹살집을 벗어나서 제대로 된 컨벤션 홀을 대관하여 행사를 진행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선배님들의 관심과 기대 또한 뜨거웠던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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