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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Dec 24. 2022

동문회 준비 일지 5

설계

동문회 경력 십오 년 세월 속에서 굴러먹은 짬밥으로 이미 나는 이번 TF팀의 면면을 환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대단한 비밀은 아니지만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그 타이틀에 그들을 배치한 것도 따지고 보면 나였으니, 내가 저질러놓은 일을 뒷수습하는 심정으로 나는 TF팀에 합류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인들의 현재 포지션이 누구에 의한 설계에서 시작된 것인지 알지 못하는 TF팀 임원들은, 자발적 노역자에 대한 공정한 예우를 하지 않고 한없이 이용하려는 것으로만 보였다.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도 못한 채, 섣부르게 상대를 자신의 밑으로 내려다보는 그 시선이 못내 참을 수 없을 만큼 껄끄럽게 느껴진 것도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전에 조직의 리더가 우선 해야 하는 절차가 있다. 그것은 조직원들의 능력을 면밀히 파악하여 능력에 따라 역할을 배치하면서 동시에 조직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과정이다. 목적에 대한 인식과 마음의 통일은 조금 다른 부분이 있는데, 마음의 통일이라 함은 일종의 '충성도'로 해석하면 쉬울 듯도 하다.


목적에 대한 인식까지 조직원들에게 다 심어줄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다면 목적에 대한 인식은 리더만이 분명하게 가지고 있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조직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켜 리더와의 협의에 충성하도록 만드는 것은,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긴급하게 TF팀에 합류하고 보니, 동문회 TF팀 조직원들에게선 충성심은커녕 업무 수행 능력이나 혹은 수행 의지마저 찾아보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동문회 일이 돈을 받고 하는 일도 아니므로 내가 구태여 최선을 다할 필요도 없고, 행사날이 닥치면 아무렇게라도 밥 한 끼 먹고 헤어지면 되는 것이겠지 하는 무사안일한 자세들이었다. 내가 이제껏 함께 일했던 조직 중에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다.


외부에서 용병을 불러올 때도 그 조직 내에서의 적합한 위치와 대우는 있는 법이다. 하지만 동문회 TF팀은 나의 노역만을 끊임없이 요청할 뿐 아무런 포지션도 내어주지 않았다. 어느 조직에서든 타이틀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과 의무를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타이틀에 걸맞은 책임과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사람이 없었다.


처리해야 할 일들은 수북이 쌓여 있는데 그것을 인지하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몇 가지 일을 급하게 처리하다가, 이대로 임원진들 밑에서 노역자처럼 일을 하는 시스템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일의 능률 면에서도 효율적이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동문회 행사만이 아니라 이 조직을 다시 설계할 필요를 느꼈다.


행사 당일까지 일주일을 앞둔 시점에서, 나는 정식으로 TF팀에 '기획총괄' 직함을 달라고 요청했다. 외부 업체들에 발주 요청을 하거나 배너 현수막 등의  디자인 작업 요청을 할 때도 구태여 직함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00과 동문회>라는 이름으로 나는 모든 일을 처리했었다. 하지만 재학생 후배들을 단톡방으로 초대하여 그들에게 소임을 부여하려고 하자 명색이긴 하여도 직함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디에서든 그 조직을 지휘하려면 직함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쯤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남은 일주일 동안이나마 어설픈 조직원들을 이끌어가려면 확실한 직함이 필요했다. 저 혼자 스스로 알아서 척척 필요한 일들을 해내는 것을 보고, TF팀의 임원들은 내가 '기획총괄'의 이름을 는데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며칠 전만 해도 딴지를 걸었던 임원조차도 더 이상 내게 허튼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날 TF팀 단톡방에 기획총괄 직함을 요청하기 전, 나는 십여 년 전 예술의 전당 대공연장 무대에 올렸던 백기완 선생님의 공연 리플릿 사진을 서둘러 TF팀 단톡방에 올렸다. 거기엔 <기획-OOO>라고 내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기획을 전문으로 하는 직장에 소속된 사람은 아니지만, 큰 공연의 기획 경험이 있다는 것을 넌지시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레크리에이션 강사 1급" 자격증과 "웃음치료사 1급" 자격증 사진을 찍어서 사회자로 내정된 후배에게 개인 텍스트로 보냈다. 십여 년 전 체육대회 사회를 한번 보고 나서 그동안 동문회에 나오지 않았던 후배는 동문들의 이름과 하는 일도 알지 못했기에, 그는 나의 공동사회자 제안을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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