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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Feb 24. 2023

(소설) 깊은 밤의 다음 날 1

지워진 줄로만 알고 있었던 어릴 적 기억의 파편들이 되살아난 건 그녀의 전화를 받고 나서였다. 낮이었다. 창문 너머로 겨울 햇살이 따스하게 넘어오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어스름 저녁에 드리워진 어둠 속의 막다른 골목에 혼자 서있는 것처럼 사방이 막막했던 것 같다. 특정 지을 수 없는 불안과 막연한 두려움들이 내 영혼을 다 먹어치우고 있는 것만 같은 시간 속비통하게 걷고 있을 때였다.


얼마 전 그녀와 처음으로 통화를 시작하게 된 것은, 어머니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면서부터다. 내년이면 구십이 되는 나의 부모님의 안부를 물으며 그녀와의 통화는 늘 그렇게 시작되었다. 휴대폰의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음성을 통해 까맣게 잊고 지냈던 작은 아버지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런 얼굴, 그런 기억들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는 것이 조금 놀랍기도 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돌아가신 작은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자마자 즉각적으로 그 얼굴에 오버랩되는 또 하나의 얼굴이 오빠 한성찬얼굴이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기억이란 교묘하게도 현재의 감정과 교차되어 재생되기도 하는가 보다. 내 두뇌는 게임 캐릭터를 디자인하듯이 무형의 모눈종이 위에 작은 아버지의 얼굴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리고 완성된 그 얼굴 위에 습자지를 대고 다시 그려보니 어느샌가 오빠의 얼굴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머릿속에서 두 사람의 얼굴이 완성되자 그제야 무언가 수수께끼가 풀리는 것도 같았다. 오빠의 정이 가지 않는 말투와 행동은 돌아가신 작은 아버지의 그것들과 매우 흡사하였던 것이다. 어릴 적에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때 이따금 뵈었던 작은 아버지에게는 다가서기 힘든 어떤 벽이 느껴지곤 했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그 벽은 한 치도 손해보지 않으려는 계산 속에서 비롯된 일종의 냉정함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냉정함을 갖춘 부류의 특징은, 자신에게 이득 될   걸로 판단되는 대상들을 상대할 가치가 없는 인간으로 즉각 분류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분류법에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자식 외에 다른 아이들에게는 상냥함은커녕 관심의 눈길조차 보내지 않는다. 물론 상냥함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들과 애당초 어울리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제 아무리 형의 자식이라 할지라도 본인의 "이익"과 관계함수를 갖지 못했던 나와 언니들은, 어린 마음에도 작은 아버지의 눈길 한번 받을 일은 평생 없을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냉철한 작은 아버지도 나와 같은 부모를 두고 있는 오빠에게만은 늘 예외였다. 오빠가 비록 꼬맹이였지만 황태자라는 오빠의 지위는 이미 부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큰집에 제사를 물려받을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둘째였던 내 아버지에게서 나온 오빠는 이 집안의 유일한 계승자가 되어 있었다. 그 철없는 꼬맹이를 황태자 떠받들듯이 모셨던 집안의 어른들은 어느덧 다 돌아가시고, 나의 아버지와 고모들만이 아직 생존해 계신다.


그때 당시 권세가 만만치 않았던 국방부에서 높은 직위에 있었던 작은 아버지는 결코 가난한 사람이 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어쩌다 한번 작은아버지와 마주한 설날이면 우리는 조카딸들이라는 이유로 껌을 한 통씩 세뱃돈으로 받아야 했다. 우리가 조금 더 자라고 나서는 그가 미리 은행에서 뽑아다 놓은 빳빳한 천 원권 지폐한 장씩 나누어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빠는 단 한 번도 세뱃돈으로 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작은 아버지가 껌 한 통씩을 세뱃돈으로 나누어 주실 때, 아버지는 두둑한 현금으로 아이들의 실망에 찬 마음을 다독여주시곤 했었다. 먼 친척 조카들에게까지 남녀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넉넉하게 현찰을 주시는 아버지의 플렉스 때문에, 평소에도 가뜩이나 사람들로 북적이던 집이 명절 때면 방방마다 사람들그득했다. 그리고 명절이 지나고 나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종종 시비가 붙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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